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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추억의 흑백사진 5. 47년 충장로의 기억

47년충장로의 기억

충장로, 그리고 충장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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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충장로 5가. 전국농구대회 우승을 자축하는 한 여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충장로를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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윳놀이를 즐기는 시민들<충장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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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식교복을 입은 밴드부<충장축제>


지금은 도시가 다극화되어 사라진 말이 하나 있다. ‘시내(市內)’라는 단어. 과거 우린 충장로 일대로 약속시간을 잡을 때 “시내서 보자”고 했고, “시내 간다”고 했다. 광주라는 도시의 중심은 당연히 충장로 일대였다. 따라서 충장로가 아닌 다른 지역은 ‘시외’가 되었던 셈이고 충장로는 시내, 즉 다운타운(downtown)의 개념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상무지구, 일곡지구, 첨단지구, 금호지구 이런 도심 속 작은 도심들이 속속 생겨났고, 그 지역에도 먹고 놀고 마실 수 있는 충분한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도시는 이제 완전히 ‘다극화’되어 버렸다. 따라서 “시내서 만나자”라는 말은 할 수가 없게 된 것. 아마도 90년대말까지나 쓰였을 말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우린 또 추억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우다방’앞에서 친구를 만나고,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척 하며 시간을 죽이고, 무등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가든·화니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충장로 5가까지 술집을 찾아 뒤지다 보면 어디에선가는 반드시 아는 이를 만나곤하던 그 곳, 충장로.  도시가 발달하고 사회도 다원화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환영할 만한 일이로되, 익명성과 복잡함만 커지고 애틋한 정은 없어져 간다는 점에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첩 속에서 발견한 오래 전 충장로의 모습 역시 화려했던 명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1947년 충장로 5가의 모습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전국농구대회에서 우승한 여학교의 거리 행진 모습’이라고만 되어 있으니 어느 학교인지, 무슨 대회에서 우승했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 여자고등학교에 농구팀이 있었다면 수피아여고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아쉽게도 수피아여고 역사자료집에는 1947년 무렵에 대한 자료가 없다). 어쨌건, 전국대회에서 당당히 우승했으니 시내에서 행진을 할 만큼 큰 일이었을게다. 해서 축하거리행진이 열렸고, 그 행진로는 당연히 충장로였다. 아마 1가에서 5가까지 퍼레이드를 한 모양이다. 금남로는 고사하고 이보다 더 크고 반듯한 중심도로는 없었을테니까. 늘어선 전봇대에 양화점간판이 보이는 충장로5가의 모습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지만.

 오랜 시간 동안 광주를 대표하던 충장로거리가 한 동안의 침체를 벗고 이제 다시 살아날 움직임인가 보다. 공동화라고까지 할 정도로 침체되어가던 이곳을 살려보기 위해 관청에서는 추억을 되살리는 충장로축제까지 기획했고, 제법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올핸 충장로거리에 나가 옛 추억이라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지… 아무리 도시가 커지더라도 광주를 대표할 만한 거리, 상징거리로 충장로가 영원하길 기원해 본다.

김옥렬_전대신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