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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표해록과 탐진 최씨. 무양서원에서 보다.

표해록과 탐진 최씨. 무양서원에서 보다.


무양서원 전경

조선에서 연암일기에 버금가는 책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표해록을 얘기한다. 이 책은 최부라는 선비가 제주 관원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해 돌아오던 길에 풍랑을 만나 중국까지 밀려갔다 온 얘기. 여행 중 겪었던 온갖 고초와 고난을 담담하게 기록한 일종의 여행기다. 그러나 여행기 안에 중국의 신 문물과 신 기술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경제적 효율성에 대하여 심도 있게 서술하였고, 운하를 제대로 건설하는 방법, 수차를 만들고 사용하는 기술 등은 당시 조선 농촌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실사구시의 책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저자인 최부가 이곳 광주사람이다. 탐진 최씨로 현재의 광산구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 사람은 책 보다도  효행으로 더 유명하다. 중국까지 표류해 간 것도 제주에서 부친의 상을 치루기 위해 험한 뱃길을 나섰기 때문이고, 낯선 중국에서 별의별 사건을 겼으면서도 내내 상복을 입고 다녔다 한다. 한 예로 북경에서 황제에게 절을 올릴 때도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고집부리다, 관원에게 강제로 상관만 벗기고 대신 사모만을 쓴채 절을 했다 한다.
이렇듯 꼿꼿하고 자존심 강했던 최부는 갑자사화 때 모함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표류에서 살아 돌아온 지 16년 만이었다. 이를 두고 남구만은 이렇게 읊었다. “청류의 화를 면치 못할 줄 일찍 알았던들/ 물고기 뱃속에 몸 감추는 것이 더 편안했으리.”
 무양서원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무양서원은 국내에서 드물게 일제시대에 세워진 서원임에도 그 가치가 높은 것은 최부같은 이의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무양서원 전경
무양서원 전경

무양서원은 1927년에 탐진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운 서원으로 고려 인종때의 어의이자 명신인 장경공 최사전을 주벽으로 그의 후손인 손암 최윤덕, 금남 최부와 문절공 유희춘, 춘열공 나덕헌 등 다섯분을 모시고 매년 음력 9월 6일에 제향을 하고 있다. 무양서원 합인문을 나와 왼쪽으로 담장을 돌아나가면 이들을 기리는 비원이 꾸며져 있다.

탐진최씨 불천위 비원
탐진최씨 불천위 비원

무양이란 이름도 광주의 본래 이름인 무진에서 따왔다. 풀이를 하면 '무진의 볕'이라는 뜻이다. 서원의 맨 앞은 강당인 이택당. 이택당 좌우에 합의문과 합인문이 있는데, 합의문은 서원에서 공부를 하던 사람들만이 드나들 수 있고 일반인들은 합인문을 통해 내왕한다. 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동재인 성지재가 있으며 왼쪽에는 서재인 낙호재가 있다.

무양서원 이택당
무양서원 이택당

서원유생들이 드나들던 합의문
서원유생들이 드나들던 합의문

무양서원 무양사
무양서원 무양사

이어 높은 대지위에 담장을 돌린 무양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내삼문인 삼오문이 있어 사우안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삼오문 좌우측 문짝 위에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귀면은 거북이 모양을 새겨놓은 것으로 장수를 의미한다. 또 다르게는 절에서 입구에 사천왕상을 봉안하듯 함부로 접근할수 없음을 알리는 신성의 표시기도 하다.
서원은 풍광이 아주 훌륭하다. 뒤로는 울창한 솔숲이 인상적이고 나지막한 언덕배기에서는 멀리 무등산까지 바라다 보인다.

무양서원 전경
무양서원 전경

무양서원 이택당
무양서원 이택당

무양서원 낙호재
무양서원 낙호재

 

 

출처 : 유투어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