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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재미와 일상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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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가 있는 마을 풍경



김경일(시인/광주생명의숲 사무처장)



[동구 밖, ‘어부바’ 나무]

마을 어귀 논밭으로 나가는 나들목에 선 나무는 마치 등이 넓은 아버지나 삼촌이 ‘어부바’ 하듯 허리를 구부리고 아이들 키 높이에 맞춤하여 서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학교가 파하자마자 누구보다 더 일찍 달려와 그 오르기 좋은 굽은 나무의 등을 안고 나무를 기어올라 높은 가지에 걸터앉아 저 멀리서 씨근덕거리며 달려오는 친구들의 잰 발걸음 수를 헤아려 보는 것이 좋았다. 마을은 그렇게 왁자한 아이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갔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몇 순배가 지나고 나서도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 자태로 서서 마을을 이윽히 굽어보고 서 있었다.

어리디 어린 새싹들이 폄을 쳐 자라나듯 아이들이 커가는 마을을 지키며 나무는 마을에서는 그 연륜을 감히 입에 올리는 이가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내 어릴 적에도 이만큼 우람했지 아마’ 라고 들었다고 할아버지들이 손자들에게 가만히 귀띔하여 줄 뿐이었다.


[시원한 여름-休]

한여름 그 나무 아래 가면 서늘한 기운이 있어서 모두들 한낮이면 ‘모이시오’ 외치지 않아도 다정한 얼굴들이 모여들었다.

어미닭이 날개 밑에 병아리 숨기듯 한껏 팔을 벌리고 그늘을 만들어 두었던 나무가,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늘 밑으로 오기를 기다려 서라운드 실시간 라이브 공연으로 솨아아 수천만 개의 이파리들을 흔들어 가없는 푸른 바닷가의 파도소리를 여지없이 선물하곤 했다.

어른들은 짐짓 그 소리에 섞어 삶의 상처로 얻은 긴 하소를 흘리거나 ‘오메, 시원한 거’ 마치 나무가 듣고 있기라도 하듯 나무를 치어다보며 치사를 거푸 하곤 했다.


그 품에 들어 안온해지는 것이 사람 뿐 이었겠는가.

허여된 제 시간 안에 제 짝을 찾으려는 매미가 내지르는 구혼의 합창소리가 몇 만 데시벨 최고로 볼륨을 올린 자연의 교향악으로 늘 함께하지 않았던가.

나무 그늘 바깥은 타는 여름 땡볕이어도, 나무 밑에 들면 촉촉해지며 서늘해지는 것이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마치 몇 천만리 서늘하게 흘러가는 푸른 강물이라도 품은 듯 나무는 유장한 호흡으로 마을을 안아주었다.

그 나무 그늘 아래 들어 뒷집 아재의 날랜 손놀림으로 짠 덕석이거나, 닳고 닳은 대나무 평상에라도 등을 붙이고 있으면 절로 하품이 나오며 낮잠에 빠져들었다.

성능 좋은 에어컨이 이러했으랴. 청량한 나무의 숨결, 나무의 에너지가 깊이깊이 곤한 육신을 쉬게 했으니, 이런 나무의 무량한 나눔공덕을 받아본 이는 평생 나무가 늘여주던 그늘 자락을 두고 멀리는 떠나갈 수 없었으리라.


이른 새벽부터 논물 보고, 두엄 내고, 소여물 주고, 고추밭 둘러보고, 윗 논배미 아랫 논배미 서로 도와 김매기하며 쉴 새 없이 종종걸음치던 순하고 우직한 농부들의 등을 다독여주던 나무. 그 두꺼운 눈꺼풀을 내리게 하여 낮잠을 고루 내려주시는 나무의 넓은 품은 마을의 큰 어른으로 대접받기에 충분하였으리라.


[신령스런 귀목나무]

나무는 잿빛 겨울을 견디고 나서 새봄엔 스스로 자연이 내린 초록 비단으로 재단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뒷집 눈 밝은 할매 말마따나 ‘깨 모를 붓기 전, 앞산 솔 숲 뻐꾸기가 울기 전’ 말로 어찌해볼 수 없는 연두 빛깔로 단장을 한 나무가 성하에 진초록으로 마을 앞을 장식하면 마을은 어느덧 활력이 넘치는 생명의 공간이 되었다. 삿되게 하고, 해가 되게 하고, 죽어가게 하는 못된 기운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보호막이 쳐진 것이다.

멀리서보면 초록 횃불처럼 밤낮으로 활활 타오르며 나무는 마을을 온 힘을 다해 지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잎사귀를 모두 떨구고 난 겨울날에는 더욱 더 신령스런 자태였다. 마치 커다란 나무 손 하나가 서있는 듯, 신라금관의 머리 장식처럼 신묘한 줄기들이 가지런히 빛나 보였다.


‘중문 안에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으면 세세생생 부귀를 누린다. 서남 쪽(申方)에 심으면 도적을 막는다.’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나무의 노여움을 사 재앙을 입는다.’

‘봄에 일제히 싹이 나면 풍년이요, 아니면 흉년이다.’

‘위쪽에서 싹이 먼저 나오면 풍년이요, 밑둥치 쪽에서 싹이 트면 흉년이다.’

‘지극정성 치성을 드리면 사내 아기를 얻는다.’

‘한밤중에 나무에서 광채가 나면 마을에 행운이 온다.’

‘밤에 나무에서 우는 소리가 나면 마을에 불행이 온다.’

‘과거길 떠나기 전 나무에 빌면 급제한다.’


이렇듯 나무를 지켜주며 더불어 잘 살아가는 슬기가 옛사람들에게는 있었다.

나무를 아끼는 마음이 온갖 금기가 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부정한 손을 타지 못하게 막아주었다.

하물며 태풍이 와서 가지를 부러뜨려도 그 가지 하나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가지는 한데 모아 나무 가까이 놓아 절로 거름이 되게 해주었다.


‘갠지 갠지 지겐 갠지...’ 정월 대보름이거나 단오나 백중 무렵 마을에 지신밟이를 할라치면 나무는 늘 영순위였다. 마을의 무사안녕이 나무의 심중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을에 역병이 돌아도 그 나무아래 정성을 다해 음식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나무가 거느린 유형무형의 식솔들이 힘을 다해 마을을 수호하였다.

그래서였을까. 아랫집 할배의 호상에도 마을사람들은 꽃상여를 메고 어릴 적부터 오래 오래 할배와 정을 나눴던 나무 밑을 몇 번이라도 맴돌아 배웅하게 하였다.


[울고 웃는 할배 느티나무]

요즈음 나무와 이렇게 깊이 교감할 줄 알았던 마을의 옛 어른들의 슬기가 그립다.

우리의 삶을 살찌워주었던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그 영성의 시간과 공간을 우리는 영영 놓쳐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나무의 기색을 보고, 나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어르신들은 나무가 가진 천리안을 빌려와 자신의 앞날을 환하게 내다보았다.

나무의 울음소리와 나무가 흘리는 식은땀에 마을과 나라의 안녕을 보고, 줄기의 시들음이나 잎사귀의 변화를 눈여겨보며 자신의 앞날을 점쳤던 뛰어난 마을의 영성가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계신가.


멀리서 보아도 늘 티가 나는 나무.

늦게 나무 꼴이 되어도 그 중 제일 귀티가 나는 나무, 느티나무는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허허허 웃음을 날려주는 마을 근동에서 제일가는 할배나무이기도 하였다.

노랗게 또는 샛노랗게 낙엽이 지면 아이들은 또 다른 즐거움을 기다리며 나무 밑을 서성거리며, 우우 잎사귀를 떨구는 나무 밑에 서서 그 고운 이파리 잡기 놀이에 지치도록 맴돌이를 하였다. 나무 밑에 수북수북 깔리는 낙엽 위에 뒹구는 재미가 녹녹치 않는 즐거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낙엽이 발밑에서 내는 신음 같은 바스락거림이 그들의 생애의 갈피 어디에서든 오래 오래 살아 남았으리라.

낙엽을 긁어모아 쌓아서 만드는 낙엽이불 속을 뒹구는 재미를 아는 아이들도 이젠 모두 힘없이 늙어버렸다.

나무의 등위에 상사리를 치고 나무가 길어 올리는 두레박질 소리를 가늠하던 숨결 고른 아이들이 느티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했다. 그들의 울고 웃는 소리에 나무의 사계가 흘러갔다.

그러나 마을엔 그 아이들이 귀하기만 하다. 몇 안되는 아이들도 느티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티븨나 컴퓨터 게임 속에 파묻혀 버렸다. 나무와 이야기를 나눌 줄도 모른다.


나무는 자신을 껴안고 가만히 귀를 대고 숨결을 나눌 줄 알던 아이들이 지금도 하냥 그립기만 하다.

그들이 느티를 살리고 지키리란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나무는 그들이 다시 다가와 살며시 귀대고 숨결을 나눌 날이 돌아오리라 하냥 꿈꾸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