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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광주 근대 역사문화의 보고 "양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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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최근들어 광주를 소개할때 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장소이지요
양림동 가까이에 살면서도 무심코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지만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 계획에 포함되어
역사문화마을조성사업에 박차
를 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마을을 찾아가보았습니다


문화중심도시 종합계획상 아시아문화교류권 사업에 포함된 이 지역은
개화기의 선교 교육 의료 관련 근대문화자원이 산재해 있고
애국애족운동의 발원지이며 전통 고가옥등 다양한 문화재군이 분포돼
역사문화마을 조성이 추진되어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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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동의 유래는 버드나무 숲으로 덮여있는 마을이라해서
양촌과 유림을 합해 양림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광주천 물줄기를 따라 사직산과 양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자리잡은 전통 주거지역으로
일제시대에 선교사가 들어와 여학교와 병원을 개설하여 서양촌으로 불려졌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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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는 양림동 주민들이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직접 마을을 둘러보며 곳곳의 숨어있는 역사를 찾아 나섰고 30여명이 조를 나눠 직접 걸어다니며 거리를 측정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광주 근대 문화의 발상지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많은 유적지가 산재해 있는데요
많게는 100여년, 짧게는 수십년의 역사를 지닌 유적지들을 22곳을 선정하여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양림동 문화지도에 표시된 곳 중 몇곳을 둘러보겠습니다



근대에 선교사들은 그들의 특수한 목적에 따라 다양한 건물을 세우게 되는데
기독교를 전파할 교회(종교시설)와 기독교 정신을 교육하는 학교(교육시설) 근대시설을 갖춘 병원(의료시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주택(주거시설)들을 보통 한 단지 안에 건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양림동 선교사 촌입니다.

수피아 여자 중고등학교

제가 수피아 여자 고등학교를 졸업한터라 굉장한 애착을 가지고 둘러볼 수 밖에 없었는데요
1908년 4월 1일 미국 배유지 선교사가 임시사택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설립(광주여학교), 1911년 가을에 교사를 준공하여 수피아여학교로 교명을 제정했다고 합니다
수피아 여학교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주도와 일시 폐교
1929년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과 무기한 휴교
1937년 일제의 황국신민화(신사참배)거부로 인한 폐교 등
수난을 거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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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아홀>
이 건물은 1911년 故 제니 수피아(Jennie Speer)기념헌금으로 지어졌는데
네덜란드식 벽돌쌓기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교사를 짓고 수피아 홀(Speer Hall)이라고 명명, 이때부터 학교 이름도 수피아 여학교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때는 음악실과 전산실로 사용했었는데
건물에 들어서면 마룻바닥의 '삐그덕 삐그덕' 소리때문에 '귀곡산장'이라고 불렀었는데
이렇게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는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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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메모리얼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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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미국 나장로교 광주 선교부에 의해 건축된 커\티스 메모리얼 홀은 "규모는 작지만 변화가 풍부하고 건축수법이 우수한 건물"이라는 격찬을 받았고 호남선교의 선구자인 배유지 목사를 기리기 위해 배유지(Eugene Bell) 기념 예배당으로 다시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현재도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로
점심시간때 고3때 친구들과 함께 기도를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배유지((Eugene B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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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브로우홀>
현재 수피아여중 본관으로 사용중인 윈스브로우 홀은
1927년 윈스브로우(Winsborough)여사의 기부금과 서로득 선교사의 설계로
지하층을 포함하여 3층 건물로 지어지게 됩니다
이 건물은 처음으로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로서
회색벽돌인 수피아호르 커티스메모리얼 홀과 대조를
이루며
광주 근대 건축의 변천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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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3.1 만세운동 기념 동상>

이는 수피아여중고 총동창회 주도로 1995년에 건립되었는데 1919년 당시 수피아 교사와 학생들 중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역사의 별이 되어"라는 추모시가 새겨져 있답니다









호랑가시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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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는 1904년 배유지, 오기원 두 선교사가 자리를 잡은 후 소중이 보호를 받아왔다고 하는데, 수령이 40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이며 높이는 6m에 이르고 잎이 두껍고 광택이 있는 가죽질이며 잎가에는 다섯개의 가시모양 톱니가 있어 호랑이가 등을 긁었다는 속설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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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는 이 호랑나무가시를 신성시했으며 가을에 익은 핵과가 겨울에도 붉은 빛을 띄며 크리스마스 트리로도 알려져 있고 호랑가시나무의 잎과 줄기를 둥글게 엮은 것은 예수의 가시관, 붉은 열매는 예수의 핏방울, 나무껍질의 쓰디쓴 맛은 예수의 수난을 의미해 ‘예수의 나무’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선교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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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기념비는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배유지(Eugene Bell) 선교사를 비롯한 미국 남장로교 광주선교부가 지역민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린 배 선교사의 임시사택 자리를 기념하여 1982년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택은 광주의 첫 복음기지, 첫 근대교육, 첫 근대의료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첫 예배와 함께 설립된 양림리 교회에서 근대정신보급과 인재양성, 계몽운동을 비롯해 3.1만세운동을 주도하여 많은 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고 교회당이 몰수되었다고 합니다



선교사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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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사택, 교회, 학교, 병원을 세우면서 근대화의 씨를 뿌렸고 얼마 후에는 생명을 다해 이 땅을 사랑한 선교사들이 여기에 묻히기 시작했습니다
이 곳은 호남 선교의 아버지로 꼽히는 우일선(Willson) 선교사와 호남 최초 의료 선교사인 오기원(Owen)씨가 묻혀있는 곳으로,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22기가 한데 분포하고 있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묘역을 기념공원으로 만들어 기독교 순례관광지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선교사 묘역을 보니 저절로 감사의 마음과 함께 숙연해지더군요..

우일선(Robert M. Willson) 선교사 사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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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무렵에 지은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광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라고 합니다. 1908년 (현)기독병원의 원장을 역임하며 의료 선교에 평생을 바치시며 봉사와 희생, 생명존중의 정신을 일깨워 주셨으며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전쟁고아들을 수용하는 시설로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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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특히 구미호 외전에서 김태희의 집 촬영장으로 더 유명세를 타기도 했었습니다





나무에 메어놓은 그네는 운치를 더해준답니다





오기원(Owen) 기념각(광주기독간호전문대학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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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이자 의사였던 오웬은 간호사인 부인과 함께 선교 및 의료활동에 헌신하다가 과로로 190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1911년 오기원의 선교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서로득(Swineheart)선교사가 기념관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1911~1912년 사이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회색 벽돌을 네덜란드식으로 쌓았는데 특히 기둥을 근대 문화의 상징인 철을 사용함으로써 이 지역 건축 문화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빨간 벽돌의 양림교회와 정말 잘 어우러지는 것 같죠??^^
                                                                                      오기원(Owen) 목사



정율성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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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음악의 대부로 꼽히는 정율성의 생가입니다. 정율성의 생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는데 이 집을 설명해주신 분의 말씀을 듣자명 정율성의 따님이 어린시절 보았던 빨간 석류나무에 대해 기억을 해냈고 그래서 정율성의 생가가 확실하다고 합니다.


정공엄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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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고 부모에게는 효행이 지극했던 정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이며, 한양까지 주인 정공의 문서를 심부름하다 죽은 충성스런 개의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와 후대에 이 정려 한켠에 견석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밖에 최승효 가옥, 이장우 가옥, 양파정, 충현원 등 많은 역사 유적지가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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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동은 많은 근대 역사 유적지들이 많이 산재해있고,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교육, 의료 등 사회계몽이 이루어진 역사적인 곳이지만, 근대 역사 유적이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관광 상품화되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직접 돌아다니면서 골목 구석구석에 있는 유적지들을 찾아가는게 결코 쉽지가 않더군요.

하지만 아시아문화중심도시사업으로 선정되어 '역사문화마을 조성계획 방침'이 결정되어 많은 지원을 받고,  좋은 동네 만들기 운동을 꾸준히 실천하는 등 주민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계속된다면 더없이 아름다운 문화공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