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소록도 나환자병원에서 일생을 마감하면서 "한국의 슈바이쳐"라고 일컫던 故 신정식 박사의 책상에는 선교사 포사이트(Wiley H. Forsythe), 최흥종 목사 그리고 예수님의 사진이 있었다 라고 한다. 왜 신정식박사는 최흥종 목사를 존경하는 인물로 이처럼 높였을까? 또한 광주시는 무슨 까닭에 1966년 그의 사망시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광주 시민장(市民葬)으로 보냈으며, 각 언론에서도 그의 죽음을 크게 애도하였는가?
광주YMCA는 무슨 연유로 건물안에 최흥종 목사의 흉상을 주조하여 지금도 높이 추앙하고 있는가? 도데체 무슨 힘이 그로하여금 일평생 동안 가족을 버리고 (마10:37-38), 병들고, 굶주리고, 헐벗고, 천대받고,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던 나환자들과 결핵환자들과 함께하였을까? (마25:35-36) 최흥종 목사는 광주중앙교회를 세우고, 남문밖교회(양림교회/제일교회 전신)와 제주도 모슬포교회 담임목사, 시베리 아선교사, 무등산 신림교회와 무등원교회를 세우고 보살폈다는 점에서 목회자이며 선교사이다. 그러나 광주 YMCA를 설립하고, 노동공제회와 신간회 전남지회장을 역임하고 모루히네(아편) 방독회 회장, 재만인권위원회 회장, 그리고 해방 후 건국준비 위원회 전남지회장 역임하는 등... 사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다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환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땅 1.000평을 기증하여 광주 봉선동 나환자 진료소를 설립하게 하고, 1932년에는 (나환자 근절협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현재의 소록도 나환자 집단 진료소가 설립되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고, 해방 후에도 흩어진 나환자를 모으고 재 수용 하여 보살폈으며, 치료된 음성 나환자들의 재활 정착촌 (호혜원)을 만들었다. 그밖에도 양성퇴원 결핵환자들의 집단 수용소 및 진료소인 (무등원)을 운영하고 거기에 교회를 세우고 영적으로 보살피면서 죽는 날까지 이 들과 함께 기거하였던 점에서는 사회사업가이다.
최흥종 목사가 이해하는 복음과 기독교는 무엇이기에 이처럼 목회자로서, 사회운동가로서, 그리고 사회사업가로서 살았는가? 본 연구자는 최흥종 목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종합적으로 연구 검토한 결과 최흥종 목사에게서 이 세가지 영역은 각각 나누어진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종합이라는 것을 일게 되었다. 최흥종 목사에게는 기독교의 복음과 사회 운동 및 사회봉사와 목회활동이 다같이 하나의 일직선상에 있었다. 그리하여 복음적- 사회봉사적- 목회자로 규정할 수 있다. 본 소고에서는 최흥종 목사의 이 세가지 영역을 소개함으로써 오늘날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표상으로 제시하료고 한다.
발췌 : 광주근대역사문화해설자료집 (호남신학대학교 전 차종순총장 원고집) 글 옮김 최종환(광주근대역사문화해설사, 광주시 블로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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