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문화재단에서 지난 6월 13~14일 증심사, 장불재, 입석대 등지에서 열린 무등산 유람기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 재연행사, 웅대한 입석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유서석록"(遊瑞石錄) 제봉 고경명 무등산 기행문
1574년 음력 4월 20일.. 41세의 제봉 고경명은 무등산에올랐다.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참으로 산은 우리 인간에게 말 없이 교훈을 준다.
'유서석록'은 제봉 고경명(1533~1592)이 나이 41세 되던 해인 1574년(선조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당시 74세인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일행과 함께 5일간에 걸쳐 무등산에 오른 감상을 4,800자의 순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으로, 430년 전 16세기의 무등산과 그 인근의 모습을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행은 증심사에서 시작해 중머리재와 입석대, 상봉, 규봉암을 거처 화순군 이서면 영신동 계곡으로 내려와 적벽을 보고 발길을 돌려 담양의 소쇄원에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문신이자 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은 자는 이순, 호는 제봉, 시호는 충렬입니다. 그의 호를 따서 유서석록을 '고제봉유서석록'(高霽峰遊瑞石錄)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중종 28년 광주의 압보촌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25년 금산전투에서 순절했습니다. 26세 때인 명종 13년(1558)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이후 사헌부 지평·홍문관 교리·순창 군수·승문원 판교 등을 거쳐 59세로 동래 부사직에서 물러나기까지 내외의 많은 관직을 역임했습니다. 그 사이 성산의 식영정 등을 무대로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특히 김인후·기대승·정철 등과 사우 관계가 두터웠다고 합니다.
만년에는 향리로 물러나 세월을 보내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자 담양의 추성관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장이 되었으며, 태인·전주·여산·은진·연산·진산을 거쳐 금산에서 적과 싸우다 안영·유팽로·그의 아들 고인후 등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유고집으로 제봉집·제봉속집·제봉유집·유서석록·정기록 등이 전하고 있습니다.
4월 20일(갑자) 맑음
갑술년 초여름 광주목사 갈천 임 선생께서 한가한 날 빈객들과 함께 서석(무등산)에 오르려 하는데, 동행할 수 있겠느냐는 글월을 보내어 나를 초청했다. 나는 어른들과의 약속을 어길 수 없어 4월 20일 산에 오를 행장을 갖추어 먼저 증심사에 기다리기로 했다.
서석(瑞石)은 우리 고을 광주의 진산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여러 차례 올라 관상하였으므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깊은 숲, 그윽한 시냇물 등 도처에 내 발자취를 남겨놓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상 범연히 보아 왔기 때문에 산에 대한 묘리 를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나무하는 시골 아이나 목동 따위가 보는 것과 다를 바 있으리오. 산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거니와 더구나 산의 정취를 얻는 데는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이제 다행히 임 선생의 청에 따라 낭풍과 현포 위에서 노니는 것과 같으니 생각하면 참으로 통쾌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흥이 나서 발길을 재촉하니 정오도 채 못 되어 골짜기 어귀에 다다랐다. 누교 위를 큰 나뭇가지가 덮고 수목이 울창하며 바위는 더욱 웅장하게 보여 물소리도 요란하니 차츰 좋은 경치에 이른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바로 말 등에서 내려 저고리를 벗고 시냇가로 내려가 발을 담그고 저 옛날의 창랑가(어부의 노래: 자연대로 맡겨야 함을 노래)를 외우며 소산(중국의 명악가)이 지은 초은의 가락을 읊으니 상쾌한 기운이 살갗에 스며들고 번거롭고 괴로운 마음이 사라져서 그야말로 속세를 벗어난 느낌이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지팡이를 끌면서 천천히 걸어 들어가니 절 문 앞에 조그마한 다리가 청류에 거쳐 있고, 여기에 고목이 서로 그림자를 비추니 절경이요, 그 그윽함에 마치 선경에라도 온 양하여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증심사 스님은 내가 여기 와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니, 마중 나온 사람이 있겠는가?
취백루(翠柏樓)에 올라 난간에 기대어 잠깐 쉬면서 생각하니, 이 이름이 ‘잣나무가 뜰 앞에 푸르다(柏樹庭前翠)’라는 글귀에서 따온 듯싶다. 벽 위에 권흥 등 몇 분의 시 현판이 걸려 있는데, 대개 홍무 년간(1368~1398)에 쓴 것으로 오직 김극기의 현판만 빠졌으니 후세 사람으로서는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후에 증심사 주지 조선 스님이 나와서 자리를 쓸고 자리를 펴 주어 나는 피곤하여 잠깐 잠이 들었다. 한식경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저녁노을은 서산에 비치고 안개가 자욱한데 놀란 노루는 대밭에 숨고 새 떼들은 숲속으로 날아들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승처상심자애”라 하여 “경치 좋은 곳에 오니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던 말이 수긍이 간다. 조선 스님으로부터 약주와 산채로 저녁을 대접 받으며 소재(蘇齋:1515~1590)가 놀러와서 하던 이야기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이야기가 들을 만했다. 조선스님의 말을 듣고 비로소 누교가 있는 시냇가 바위에 최송암이 쓴 시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았으나 새긴 획이 옅고 이끼가 끼어 얼른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애석한 일이었다. 절 옆에 있는 대밭은 산에 이어졌으니 규모가 커서 위천(중국 황하의 지류)의 그 넓은 죽림에도 비길 만하다.
갑이년(명종 9년) 봄에도 내가 이 절에 와 놀았는데, 그때는 대 마디가 한 자쯤 되게 길고 그 크기가 서까래만큼 커서 이에 비할 만한 것이 딴 곳에 없었는데, 지금은 가는 대만 우거진 쓸쓸한 숲이 되어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없게 됐다.
▲ 광주문화재단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 재연행사, 증심사 일주문을 지나 산에 오르는 모습
증심사(證心寺) 조선 스님이 법당을 가리키며 “이 건물은 세상에 전하기를 고려 초에 유명한 목수가 지었다는데, 천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기둥과 주춧돌이 기울지 않고 의젓하게 홀로 남아 있으며, 좌우에 있는 요사는 몇 번을 개축했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이 절에 대장경 판본과 여러 가지 불경이 든 상자가 한 전각 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지금은 전각만 남고 경전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이 날 저녁에 이만인과 김형이 함께 와서 유숙했다. 노승이 등불을 밝히고 향을 피워 예불을 마친 다음 숙소에 와서 공손히 앉아 말하기를 “이 곳에는 옛날에 향반을 설치했다가 연루(연꽃 모양의 물시계)로 갈아 바꾸어 시각에 따라 종을 치기 때문에 시끄러워 주무시는 데 방해가 될까 염려된다”고 하기에 “우리들이야 오랜 만에 속세를 벗어나 잠시나마 이 좋은 곳에 머물며 고요하고 맑은 저녁에 절로 잠도 잊을 것이요, 또한 맑고 깨끗한 종소리가 듣기 싫은 것도 아닌데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깊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세 사람이 밤 늦도록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밤은 깊은데 노승의 코 고는 소리가 천둥소리 같아서 더없이 우스웠다.
새벽녘에 남풍이 세게 불어 나는 비가 내리지 않을까 염려되어 조선에게 물었더니 자기는 이 산에 오래 살아 구름이나 바람을 예측할 수 있는데, 비록 남풍이긴 하나 비 내릴 징조는 아니라고 했다.
4월 21일 맑음
아침 느지막이 임훈 목사가 당도했는데 신형, 이억인, 김성원, 정용, 박천정, 이정, 안극지 들이 따라왔다. 나는 임 선생을 취백루에서 맞이했다. 누대 앞에 오래 묵은 측백나무 두 그루가 있는 것이 보기에 한가롭고 좋았다. 이것이 비록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나 취백루라는 이름에는 손색이 없다.
술을 두서너 순배 한 후 임 선생이 밥을 재촉하여 떠나기를 서두르는데, 마부를 물리고 종들도 줄여 선생은 야복차림으로 대로 엮은 가마에 올라 증심사 주지 조선 스님의 안내로 증각사로 향했다. 응수 박천정이 서쪽의 한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것이 사인암(약사사 앞 서쪽에 있음, 속칭 새인봉)으로 전에 꼭대기에 올라가 보았더니 돌부리가 구름을 찌르고 벼랑이 허공에 솟았으며, 매의 둥지가 있는 것을 굽어볼 수 있었다고 했다.
증각사(證覺寺)에 정오쯤 이르니 안개가 짙어 멀리는 바라볼 수 없었으나 정자와 넓은 들, 그리고 비단결 같은 여러 시냇물을 모두 가리킬 수 있으니 비로소 이곳이 꽤 높은 자리임을 알겠고, 그래서 더 멀리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절의 북쪽에는 분죽, 오죽, 두 종류의 대가 있는데, 분죽은 그 진을 빼고 지팡이를 만들면 매우 광택이 나고 미끈한 것이 된다.
▲ 광주문화재단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 재연행사, 장불재에서 주안상을 앞에 두고 시대를 논하며 무등산에 관한 시를 읊는 모습
차를 마시고 길을 떠나 이정을 거쳐 중령(中領, 지금의 중머리재)으로 올라갔다. 깎아 세운 듯한 가파른 길은 하늘에 닿을 듯하여 사람들은 마치 물고기를 꿰미에 꿰어놓은 듯하고, 꿰미가 줄지어 서로 붙들고 개미 기어가는 듯했는데, 한자를 올라가면 한길쯤 뒤로 물러난다.
이윽고 평평한 곳에 이르니 시야가 탁 트이고 상쾌한 기분이 마치 바다에서 배 뚜껑을 젖히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중머리재에서 산길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서니 밀림이 우거져서 구름과 햇살을 볼 수 없고 높고 험한 등성이는 허공에 걸쳐 있어, 다만 새가 빠르게 날 때 푸른 이끼가 나부낄 뿐이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노래를 읊조리며 오르노라니 잠시나마 등산의 힘겨움을 잊게 해준다.
냉천정(冷泉亭)에 임 선생이 먼저 도착하여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샘물은 나무 밑 돌 틈에서 나오는데, 그 찬 맛은 도솔천에 미치지 못하나 단맛은 그보다 더한 듯싶다. 때마침 모두 목이 말라 서로 서둘러 미숫가루를 타 먹으니 좋은 간장과 단술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나 그 맛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으랴 싶다.
▲ 광주문화재단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 재연행사, 입석대에 오른 일행들이 '광주목의 진산' 무등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함
입석대(立石臺) : 석양에 입석암에 닿으니 양사기(중국 명나라 초의 문인이자 정치인)의 시에 이른바 십육봉장사라는 곳이 바로 여기로구나 싶다. 암자 뒤에는 괴석이 쫑긋쫑긋 쭉 늘어서 있어서 마치 진을 치고 있는 병사의 깃발이나 창검과도 같고,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도 하며, 그 희고 곱기가 연꽃이 처음 필 때와도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벼슬 높은 분이 관을 쓰고 김 홀(笏)을 들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철옹성과도 같은 튼튼한 요새다. 투구철갑으로 무장한 듯한 그 가운데 특히 하나가 아무런 의지 없이 홀로 솟아 있으니 이것은 마치 세속을 떠난 선비의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천지개벽의 창세기에 돌이 엉켜 우연히 이렇게도 괴상하게 만들어졌다고 할까. 신공귀장이 조화를 부려 속임수를 다한 것일까. 누가 구워 냈으며, 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아미산의 옥으로 된 문이 땅에서 솟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성도의 석순이 해안을 눌러 진압한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의 형세를 보니 뾰쪽뾰쪽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가운데 헤아려 볼 수 있는 분명한 것이 16개 봉우리다. 그 속에 새가 날개를 펴듯, 사람이 활개를 치듯 서 있는 건물이 암자다. 입석암은 입석대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우러러보면 위태롭게 높이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 없다. 바위 밑에 샘이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서쪽에 있어 아무리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 광주문화재단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 재연행사, 입석대로 올라가는 일행
암자를 떠나 조금 북쪽으로 입석을 오른편에 끼고 불사의사(不思議寺)로 들어갔다. 입석에서 동쪽으로 길은 험하지 않다. 반석이 마치 방석같이 판판하게 깔렸는데, 지팡이를 짚으면 맑고 높은 소리가 울리고 나무 그늘이 깔린다. 혹은 쉬기도 하고, 혹은 걷기도 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니, 낭선의 ‘나무 그늘 밑에서 자주 쉬어가는 몸이로다(數憩樹邊身)’라는 한 시구가 이 정경을 나타내는데, 알맞아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뵈기만 한다.
이 산속에는 너덜의 이름이 붙은 곳이 두 곳이 있는데, 증각사 동북쪽에 있는 것이 덕산(德山)너덜이다. 덕산너덜은 소나기가 갤 때면 몰래 숨어 있던 이무기가 나와 햇볕을 쬐는데, 몸을 칭칭 감고 도사리고 있어서 사람이 감히 접근할 수가 없다고 한다. 또 일찍이 어느 스님이 보았더니 노루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것을 어떤 괴물이 나타나 잡아채어 가로 물고 돌 사이로 들어가는데, 햇빛이 번쩍거려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지공(指空)너덜만은 벌레나 뱀 따위의 기어 다니는 짐승이 없고 가을이 되어 떨어진 나뭇잎 하나 떨어진 것이 보이지 않으니 스님들 사이에 전해지기를 이 너덜은 고승 지공이 그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곳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4월 22일 맑음
아침에 판관 안언룡과 찰방 이원정이 먼저 일어나 입석암으로 갔다. 그들은 어제 날이 저물어서 구경을 못 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임 선생을 따라 바로 상원등(上元燈)으로 갔다.
정상삼봉(頂上三峯)에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동쪽이 천왕봉이며, 가운데 것은 비로봉, 그 사이는 100여 척 되며 평지에서 바라보면 대궐을 마주보는 것 같다. 서쪽에 있는 것이 반야봉으로 비로봉과 두 정상의 거리는 무명 베 한 필 길이나 되지만 밑은 한 자 거리쯤밖에 되지 않으니 평지에서 바라보면 화살촉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상 봉우리에는 잡목이 없고 다만 진달래와 철쭉이 돌 틈에 무더기로 피어 있으며, 키는 한 자쯤 되는 것이 가지는 모두 남쪽으로만 쏠려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낭떠러지의 서쪽에 참빗살처럼 서 있는 돌무더기는 높이가 모두 100척이 넘게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서석대(瑞石臺)다. 이 날은 안개가 조금 개어 어제에 비하면 맑은 날씨이기는 하나 사방 산들을 멀리는 바라볼 수 없고 가까운 산이나 큰 강은 대개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삼일암과 금탑사 삼일암의 월대에는 입석이 있어서 그 생김새가 매우 기괴하고 시원스러운 품이 모든 암자 가운데 뛰어나다. 조선 스님의 말에 의하면 사흘만 여기 머물면 도를 깨닫는다는 데서 삼일암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금탑사는 삼일암의 동쪽에 있으며, 수십 척 되는 돌이 하늘을 떠받들고 우뚝우뚝 솟아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돌 속에 구급상륜이 감춰져 있다고 하여 절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석문사, 금석사, 대자사 석문사는 금탑사의 서쪽 80보 정도에 있으며, 동서에 각각 기이한 바위가 마주서서 마치 문처럼 되어 있고, 이곳 사람들은 여기를 거쳐 출입하게 되어 있다.
금석사는 석문사의 동남쪽에 있다.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고갯마루 흰구름이 산 문을 닫았다’ 한 것은 여기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암자 뒤에 기암초석 수십 가닥이 수북하게 높이 서 있고, 그 아래 맑은 돌샘이 솟아 있으며, 물이 매우 차갑다.
대자사의 옛터는 금탑사의 아래에 있고, 여기에도 오래된 샘이 있어, 물이 맑고 찬데 이끼가 끼지 않은 것도 이상하다.
규봉암(圭峯庵) : 금석사를 지나서 산허리를 감돌아 동쪽으로 나오니 이곳이 규봉으로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바윗돌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어 이루었네’라 한 것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암석의 기묘하고도 오래된 품이 입석과 견줄 만하다고 할 수 있으나 폭이 넓고 크며 형상이 진기하고도 훌륭한 점에서는 입석이 이에 따를 수 없다. 규봉의 경치는 권극화의 기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 생략한다.
광석대(廣石臺)가 있는 곳은 이 암자의 서쪽으로 그 석면이 깎아지른 듯 넓고 평탄한 것이 격에 맞고 수십 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무릇 규봉암의 빼어남이 서석에 있는 모든 암자 가운데 으뜸이라면 이 광석대 또한 규봉 10대 가운데 가장 빼어났으니 남쪽에서 제1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4월 23일 맑음
아침에 일찍 일어나보니 산골짜기에 흰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올라 고르게 퍼져 줄을 그어놓은 것 같고, 그 위에 솟은 수많은 봉우리는 만경창파 넓은 바다에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과 같았다. 그 뒤로는 아침 햇살을 받은 구름이 붉은 빛깔로 물들어 바람 따라 형형색색의 온갖 모양을 이루니 참으로 절묘한 광경이다. 한퇴지의 시에 이른바 ‘비낀 구름이 때때로 평평하게 어렸네’하는 구절도 이 기묘한 절경을 다 표현하지 못하였다 할 것이다.
임 선생이 머리에 복건을 쓰고 처마 앞에 나와 앉으며, 이 뛰어난 경치를 찬탄하는 4언절구 한 수를 읊으신다. 그 사이 해는 이미 중천에 뜨고 구름도 차츰 흩어져서 날씨가 활짝 개니 천지가 개벽된 것 같은 참으로 절경이 펼쳐져 있다. 선생의 말씀에 따라 광석대로 자리를 옮겨 일행이 시를 지어 화답했는데, 이에 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주 한 잔씩을 큰 잔으로 내려 마시게 했다.
광석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송하대가 있고, 거기서 동쪽으로 비스듬히 뻗은 산등성이를 타면 영신(靈神)골인데, 그리로 가는 오솔길이 꼬불꼬불 줄을 그어놓은 것 같아서 소동파의 시에 이른바 ‘길은 산허리를 감고 삼백굽이를 돌았구나’하는 구절이 떠오른다.
▲ 광주문화재단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 재연행사, 계곡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는모습
장불천(長佛川)이 흘러 그 아래로 깊은 못을 이루었는데,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으며, 못가에 나부끼는 산갈대의 은빛이 푸른 소나무숲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펼쳐놓은 것 같다. 동네 이름을 몽교라고 하는데, 시의 소재로도 쓰일 만한 운치가 풍긴다. 시냇물 건너 동쪽을 바라보니 푸른 절벽이 수백 걸음이나 이어져 있어 산수화의 채색병풍을 비스듬히 펴놓은 것 같고, 그 위로 한 가닥 좁은 길이 나 있다.
창랑천(滄浪川)이라 함은 옛날 남장보가 이곳을 지나면서 지은 이름으로 남령과 장불의 두 천이 합쳐진다. 이곳 장불천은 상류에서 쇠붙이를 씻었기 때문에 언제나 탁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으며 못 가운데는 돌층계가 있다. 큰 고기가 뛰는 모습이 햇빛에 반짝여서 한결 운치를 돋우어 주고, 물고기떼의 그림자가 물속 돌 위에 반사되어 비단구름과도 같은 찬란한 모습이 마치 용궁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거기에 은어 수십 마리가 발랄하게 뛰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내 비록 고기의 마음은 모르기는 하나 그들이야 말로 얼마나 즐겁겠는가.
적벽(赤壁), 항아리 모양 같은 옹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온통 돌로 에워싸여 골산을 이루었는데, 봉우리가 서로 쳐다보기도 하고 내려다보기도 하며, 어떤 것은 일어섰고 어떤 것은 엎드리기도 하여 형세가 꼭 싸움터에서 군마가 달리다가 잠깐 멈춰 서서 이 절벽이 된 것 같다. 천지조화의 힘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장관을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싶다. 높은 곳에 올라 덩굴을 이어 높이를 재어보니 거의 70발이나 됨직하다.
소쇄원(瀟灑園)에 신시에 당도했다. 이곳은 양산보가 지은 것이다. 비단결 같은 물줄기가 집 동쪽에서 담장을 꿰뚫고 흐르는데, 물소리는 구슬을 굴리는 듯 시원스럽게 아래쪽으로 돌아 흐른다. 그 위에는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다리 밑 물속에는 큰 돌이 깔려 있는데, 그 바닥이 천연의 절구통이 패어 있다. 이를 조담이라 부른다. 여기에 고인 물이 쏟아져 내려가면서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그 물 떨어지는 소리가 거문고를 켜는 소리처럼 맑고 시원하다.
식영정(息影亭)에 해질 무렵에야 당도했다. 이곳 식영정은 일행인 강숙(剛叔, 金成遠)이 지은 별장이다. 식영과 서하의 두 액자는 그 모두가 박영이 쓴 것이라는데, 식영은 팔분체요, 서하는 전자체로 씌어 있다. 식영정과 서하당의 내력과 아름다운 풍치는 이미 임석천의 기록에 남김없이 실려 있고 20영에도 들어 있다. 서하당 뒤뜰 돌담에는 모란, 작약, 해당화, 왜철쭉 등이 빽빽이 심어져 있는 것이 그 모두가 뛰어나 자연미를 화려하게 더해 주고 있다.
4월 24일 맑음
환벽당(環碧堂)은 식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정자 하나가 날 듯이 서 있으며, 그 앞에는 반석이 깔려 있고, 그 아래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다. 이 정자는 학자 김윤제가 살던 곳으로 신영천이 환벽당이라 이름 지었다는 것이다.
아침에 창평 현령 이효당이 와서 임 선생을 뵈었다. 서하당이 임 선생을 위하여 마련한 술자리에 일원(一元 李萬仁)이 소쇄원으로부터 뒤늦게 와서 다시 큰 잔으로 순배를 돌리니 그 술자리가 미처 파하기 전에 임 선생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판관(安彦龍)과 여러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나는 김성원이 만류하기에 식영정에 올라 다시 술을 들면서 한담을 했다. 이윽고 술에 취해 소나무 밑에서 한잠 깊이 자고 문득 깨어보니 한 바탕 남가일몽을 꾼 것 같다. 빈 산은 고요하고 솔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는 가늘게 울려와서 꼭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이 허전하기만 하다. 돌아보니 서석의 영봉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 있었다.
이상으로 서석 탐승의 대강을 적어 그 경과와 전말을 끝맺을까 한다. 임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나 후일에 다시 선생을 모실 기회가 없을지라도 이 기록을 펴봄으로써 선생과 함께 친히 이야기하고 즐기던 그 날을 회상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건대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6개 성상이 번개같이 지나 뵈올 날이 많지 않을 것이니, 이 산에 오르면 그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참으로 산은 우리 인간에게 말 없이 교훈을 준다. 그러나 산에 오르려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내가 서석에서 느낀 감상을 알아줄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석양에 평상복 짚신 그대로 임 선생 댁을 찾아 작별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서, 여옥(汝玉, 李偵)을 비롯한 친구들과도 헤어져 돌아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니 며칠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린 것만 같다.
선조 7년(1574) 갑술 5월 초일에 장택산인 고경명은 기록한다.
<자료출처> 글 : 산문기행, 山書, 가사문화권 문화재 소개, 사 진 : 광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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