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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

씻을 수 없는 상처, 6·25 한국전쟁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그 날 6월 25일은 6·25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하여 3년 1개월간 계속된 한국의 전쟁입니다.

해방 후 5년만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으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체제를 강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배경은 무엇일까요?


첫째, 친일파 처단을 위해 설치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이승만정권의 탄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고, 미국정이 유지시켰던 친일세력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비호함으로써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국가로서의 명분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둘째, 군부의 반란과 민중들의 저항이 고양되고 있었습니다. 해방 후 민중운동은 드 높아져서 

선거반대투쟁, 2·7구국투쟁 등으로 한층 치열해졌습니다.


셋째, 이승만 정권은 극심한 정치 경제적 불안을 맞고 있었습니다. 

정부세출이 적자세출이었고, 공업생산은 감소했으며, 이승만의 지지세력도 감소했습니다.






한국전쟁 과정은 어땠을까요?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경 38선 여러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시작된 전쟁은 4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단계, 북한 인민군이 4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3개월만에 대구와 부산 등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학했습니다. 


인민군은 점령지역에서 당과 인민위원회를 재건했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여 국제연합군 참가를 결의케 함으로써 전쟁은 국제전화 되었습니다.


2단계, 미군을 주로 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38도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

했으며 한국군 일부가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한 시기로, 미국의 영향하에 있던 유엔은 총회

에서 38도선 이북진격을 승인하고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을 설치했습니다.


3단계, 유엔국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역전된 시기입니다.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 철원 금화 일대까지 진출하고, 소련이 

휴전을 제의하여 휴전교섭에 들어간 시기입니다.


4단계, 휴전회담 진행과 휴전 협정의 성립기입니다.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즉각 받아들여 15일만에 개성에서 예비회담이 개최되고, 이어 본회의가 열렸습니다. 


주요문제는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과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이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한국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명의 부상자를 냈고,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폭격으로 인한 북한지역의 피해는 극심하여, 미군지휘관이 "더 이상 목표물이 남아 있지 않다"고  공언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남북의 적대감은 극도로 심화되어 민족분단 체제가 더욱 굳어졌으며 남한의 경우 반공 이데올로기가 초법적 권위를 지니고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동서냉적을 격화시키는 

고비가 되었습다.





이렇게 나누어진 우리나라는 60년이 넘도록 통일이 되지 않은 채 전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있습니다.


38도선을 휴전선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쉬고 있다는 뜻의 휴전.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우리 국민들이 이러한 걱정 없이 사는 미래를 꿈 꿔 봅니다.


6월 25일 하루만큼은 그 날의 희생을 기억하며, 6·25 한국전쟁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