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시대 마한 땅, 백제 때 파지 성, 고려 때 낙안군 고을의 터며,
조선시대 성과 동헌, 객사, 초가가 잘 보존되어있다.
초가지붕 위에 하얗게 내린 눈과 골목을 돌아서면 고향의 어머니가 마중 나와 있을 것만 같은
정겨움과 포근함은 현대인의 삶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옛 삶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다른 지역성과는 달리 넓은 평야 지대에 1~2m 크기의 정방형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4m,
너비 3~4m, 성곽 총길이가 1410m로 동내, 남내, 서내 등 4만1천 평에 달하는 3개 마을 생활 근거지를
감싸 안은 듯 네모 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500년이 가까운 지금도 끊긴 데가 없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성안 동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오래된 비각을 만나게 된다.
조선태조 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에 나섰고 300년 후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했다. 임경업 장군은 조선
선조 27년(1594년)
판서 임정의 후손이며,
임황의 아들로 충주 풍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힘도 장사였다고 전해진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집을 나와 단월사에서 3년, 보은 속리산 문장대에서 2년 동안 무술 연마에 힘쓰다가
광해군 10년(1618년), 25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여 소농보 권관이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공신이 되었고, 낙안군수, 영변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군사시설을 보완하고 북방정책을 다하였다.
그러나 양대 호란(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소용돌이 속에 김자점의 모함으로
반역죄로 53세의 나이로 죽게 되지만,
1697년(숙종 23년) 특명으로 명예가 회복되어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임경업 장군에 얽힌 신기에 가까운 전설이 전해오는데
그중 하나는 하루 동안 낙안 성을 쌓았다고 하며, 또 다른 하나는 어느 날 큰 못가를 거닐다가
한 마리의 용이 입에 물고 나온 단검을 얻게 되자
칼에다 '용천검(龍泉劍)'이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잠시 그 시를 감상해보자.
三尺龍泉萬卷書(석자의 용천검은 만권의 서적과 같다.) 皇天生我意何如(하늘이 나를 냄은 어인 뜻인가.) 山東宰相山西將(산동에 재상 나고 산서에 장수 난다는데) 彼丈夫兮 我丈夫兮(저들이 대장부면 나 또한 대장부가 아니냐) 그러나 이 용천검은 일본사람이 훔쳐갔다고 하여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
임경업 장군의 분신이었던 보검을 볼 수 없지만 숙연한 마음으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둘러보고 나온다.
실제로 낙안읍성은 아이들에게 더 없이 좋은 살아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다,
성 안에는 108 세대가 실제 생활하고 있어 전통적인 취락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민속 마을이다.
조상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 친근한 정감이 넘치며, 남부지방 독특한 주거양식인
툇마루와 부엌, 토방, 지붕, 섬돌 위의 장독과 이웃과
이웃을 잇는 돌담은 모나지도, 높지도 않고 담장이와 어우러져 우리의 옛 고향을 연상케 한다.
마을주변 음식점 거리도 옛 정취를 물씬 풍겨준다
성내의 가옥들을 서민집들이다. 양반집 가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성내 마을은 관원의 관속들이나 평민들이 주로 거주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반들은 성 밖에서 주로 거주 하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낙안읍성을 성곽에 올라가 전체적으로 마을을 살펴보면 안락한 풍경이다.
낙안, 역시 이름 그대로이다. 즐거움과 편안함이 그득 넘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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