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궁뎅이'는 80년대 프로야구의 아이콘이었음에 틀림없다.
배트를 뒤로 잡고 다리를 구부리고 다른 타자들보다 엉덩이를 훨씬 뒤로 쭈욱 뺀 모습은 영락없는
오리의 궁뎅이 그것이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포즈와는 다르게 80년대에 한해 최다홈런(30개) 최다타점(89점)등의 기록을
양산했으니 그 포즈는 '명품오리'라고도 할 수 있었다.
왕년의 김성한
'김성한'
그는 프로야구 원년(82년)부터 95년까지 14년동안 선수생활을 하며 타자로서의 위대함을 뽐냈다.
특히 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삼성의 강타자 '이만수' 선수와 홈런왕 라이벌 경쟁구도를
구축하며 관중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는데 일등공신이었다.
80년대 해태야구는 투수 선동열 타자 김성한으로 일축되었다
선수가 부족하면 타자건 투수건 마구잡이로 뛰기도 했던 제대로 시스템이 구축되어있지않던
80년대에 김성한은 역대 앞으로도 깨지지않을 불멸의 기록을 하나 세웠다.
바로 원년에 달성한 투수 10승과 타점왕 동시석권!
에이스로서 필요한 10승과 4번타자로서 가장 필요한 타점능력을 한 선수가 그것도 한 해에
이루어냈다고 한다면 믿겠는가?
당시 강속구로 인정되었던 140Km를 가볍게 뿌리며 해태마운드의 한 축을 담당하였고,
타자로서도 3할과 13홈런 69타점(1위)를 기록하며 공수양면의 핵이 되었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지못할 철인의 기록이며 안좋게말하면 혹사였다.
(최근에 타자가 잠깐 투수로 등장하거나 투수가 잠깐 타자로 등장하면 그 자체만으로도 관심집중
이 되더라. 그런데 김성한은 타자,투수 행위를 무려 4년동안이나 했다.)
88년에는 타자로서 포텐셜이 폭발!
0.324에 홈런30개(1위, 당시 최초 30홈런 돌파 - 장종훈에 의해 깨짐 91년35개)
타점89점(1위, 당시 최다 타점)을 기록하며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타자로 군림한다.
김성한 선수 기념구
일본야구와 수준차이도 하늘과 땅 차이로 나던 그 시절에, 한일 슈퍼게임이나 세계 선수권 야구대회가 열리면 어김없이 일본선수들의 뛰어난 제구력과 구속, 우리에겐 생소한 구질들(포크볼,SF볼등 -
당시엔 우리나라에서 던지는 사람이 없었다)로 헛스윙만 뻥뻥해대던때에 김성한은 그런 투수들을
상대로 도쿄돔 상단에 홈런을 적지않게 꽂아넣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죽했으면 뉴스 앵커도 '김성한선수가 한국야구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할정도였으니...
나이로 인한 기량쇠퇴로 95년까지의 14년간의 선수생활을 마친다.
해태구단을 기아가 인수하던 01년 그 해, 김성한은 친정팀의 감독으로서 다시 함께 하게 된다.
어수선했던 팀분위기를 일축시키고 바로 그 해에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킨다.
4년여간 감독직을 맡다가 비록 선수폭행(?)이라는 혐의로 감독직에서 물러나지만 그의 강한
리더쉽은 기아를 자주 포스트시즌에 오르내리게 하는데 가장 큰 이유였다는것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아타이거즈 감독 시절
오히려 지금 기아 선수들이 김성한 감독시절의 그런 헝그리정신이 부족한것처럼 보여 마음이
씁슬할때도 있다.(요즘엔 군대도 그렇고 서로를 아껴주고감싸주는게 대세이니-_-;;)
김성한, 이만수, 김봉연 등의 80년대 최고의 홈런타자들이 있었기에
기량이 점점 상승하는 90년대 초반의 장종훈이라는 걸출한 홈런왕이 등장하고,
90년대 후반에서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있는 국민타자 이승엽이 뒤를 잇고,
김태균, 이대호 같은 신생 거포들이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올드 스타들을 경기장에서 자주 보고 싶다.
팬들의 이런 염원을 담아 KBO측에서 올드 스타들을 우대해주는 그런 System들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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