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고개와 무진고성- 광주랑
“산자수려.” 산좋고 물좋다는 곳. 이런곳에 붙여진 이름이 산수동 아니던가. 광주에도 이러한 산수동이 있다. 무등산 자락이 너른 들판과
만나던 곳. 그 속에는 꼬두메,잣곡,황정지 같은 예쁜 이름의 마을들이 있기도 하다. 무등산의 들머리 역할을 하는 산수동오거리에서 무등산 자락으로
접어들면, 구불거리는 고개가 나온다. 잣고개다.
<무진고성이 있는
잣고개>
<무진고성을 지나는 무등산 옛길>
입구에는 광주옛길 간판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옛길을 따라 걸어가면 구불구불 찻길과 꼭대기에서 만난다. 광주의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이기도하다.무등산 도로가 나기 전까지 잣고개는 시가지에서 충효동과 담양을 걸어 넘나들던 무등산의 관문이었다. 이 고개를 넘어서면서
옛 사람들은 마을로 들어서는 마음을 추스렸고 고을의 안쪽과 바깥 세상을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많은 이들의 흔적을 담아냈던 것이다. 그저 무심히
지나던 이 잣고개 . 무슨 뜻일까? 대부분의 지명들이 그러하듯 대충 이름자를 되짚어 보면 그 내력을 얼추 더듬어 볼 수 있다. 혹여 근처에
잣나무가 많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고 또는 까치가 날아드는 곳이라는 작(鵲)고개가 변해서 된 이름인지 추측도 해 본다. 그러나 ‘잣’이란
옛말의 어원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잣고개는 우리말로 성(城)고개라는 이름과 통한다. 즉 ‘잣’이란 성을 나타내는 옛말이고 이 곳에는
옛날부터 성이 있어 잣고개라는 이름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무진고성에서 보이는 광주시내>
<무진고성 전경>
실제로 여기에는 새로 쌓은 성이 있다. 본래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무진고성이 있던 자리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의하면
광주는 무진도독고성(북 5리, 토성)과 무등산 고성, 그리고 읍성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무진도독고성이 바로 여기가 되는 셈이다. 즉, 이
고개와 성터가 광주의 역사의 시작점이란 얘기도 된다. 무진고성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다.
무진고성은 생각보다 크다. 무등산 자락 지산유원지 쪽의 장원봉에서 잣고개를 거쳐 상태봉과 충효동 넘어가는 길의 제4 수원지를 잇는
타원형의 산성이다. 이중 현재 복원되어 있는 곳은 잣고개 양쪽의 일부 구간뿐. 복원된 잣고개쪽은 이 성의 서쪽이고, 서문이 있던 곳이라
여겨진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동문터가 있어, 그 내력은 더욱 명확하다.
<견고하게 짜여진 무진고성 석축>
<무진고성 석축>
성벽은 아주 견고하게 짜여있다. 능선의 진행방향을 따라 바닥을 L자 형태로 다듬고 그위에 석축을 쌓고 석축과 능선경사면 사이에는 돌과
흙을 채워 다진 형태다. 이 모양만 보아서는 백제의 축성법과 비슷하지만, 잡석을 채운 방식등이 백제이후의 방식이어서 통일신라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무진고성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성벽위에 올라서면 광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그너머로 산길을 내려가면 다시 찻길과 만난다. 거기에 동문터가 있다. 무진고성이
탄생을 제대로 알려주는 곳이 여기다. 소쇄원의 담장을 바치고 있는 수문처럼 이곳에도 계곡을 가로지르는 성벽 아래에 수문역할을 하는 석축이 있어
눈길을 끈다.
<무진고성 동문터>
이곳을 발굴할 때 기와편과 막새기와, 순청자와 상감청자들이 발견되어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이 성이 만들어 졌다가 9세기 중반에
허물어 졌고 이후 다시 쌓아 고려 초(12세기)까지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근거가 되었다.
맨 처음 읋었던 산자수려 한 곳에는 사람이 살게 마련이다. 광주를 일군 첫 조상들의 터전이 바로 여기였으리라.
<동문터앞 무등산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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