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3대음악가로 중국민의 추앙을 받고있는 정율성 선생님은 (1914~1976)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음악가, 호적명은 부은富恩, 본관은 하동河東, 해업海業의 아들이며, 최흥종崔興鐘 목사의 생질로 광주시 양림동에서 낳고 자랗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1922년 화순 능주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1923년 광주 숭일소학교로 전학 1928년에 졸업하고, 같은해에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하여 1932년 4월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1933년 5월에 형 의은義恩을 따라 목포에서 평안환平安丸호를 타고 부산과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중국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그의 중국생활이 시작되었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곧 남경으로가서 유대진劉大振이란 가명으로 중국에 있던 한인 항일단체인 의열단에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고 1934년 4월 20일에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의열단에 남아 비밀 항일운동에 종사하면서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일본요인 암살 첩보활동 전개 등으로 사회주의사상에 몰입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상해에 체제하고 있던 소련의 유명한 음악교수 크리노와(Krenowa)를 만나게 되어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면서 이름을 율성律成으로 고쳐 불렀다. 1936년 4월에 남경에서 중국 좌파계통의 청년들이 조직한 '5월 문예사'에 자형妹兄 박건웅과 함께 참여하여 이사직을 맡아 활약하면서 5월 1일의 "5월 문예사" 성립대회에서 그는 만돌린을 타면서 자기가 작곡한 "오월의 노래"를 부르고 나중에 한국의 아리랑을 불러 그 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 후 《팔로군행진곡(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을 작곡함으로써 정율성의 음악활동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머므르면서 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등을 작곡하기도 하였는데, 군정 시에 양림동에 살던 어머니를 모셔가 북한에서 살았다. 1950년 6.25전쟁 직후 중국 주은래周恩來총리의 요구로 그해 10월에 77세 어머니를 모시고 중국으로 들어가게되었다. 이후 중국 국적에 가입하고 음악작곡에 몸 바쳐 왔다. 그는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비롯하여 옌안송, 팔로군행진곡, 연수요, 흥안령에 눈이 내리네, 해안의 초병, 유쾌한 해안포병, 망부은 등의 노래를 작곡하여 중국에서 최고 음악가의 반열에 올라 추앙받는 3대 음악가가 되었다. 1976년 12월 7일에 주은래총리를 노래하는 연가와 중국 건국 50주년을 위한 대형작품을 제작하다 베이징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 팔보산 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뒤에 정율성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가 제작, 상영 되었고, 2005년에는 광주에서 "광주정율성국제음악제조직위원회"를 결성하고, 8월 4일 제1회 음악제를 개최하고 매년 음악제를 실시하고 있다. 남구양림동에 정율성 거리가 조성되었다.
촬영편집 최종환(광주광역시 블로그기자) 자료발췌 남구를 빛낸 사람들 책자중에서발췌 옮겨씀 2012.10.31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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