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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사진으로 보는 역사 - 사라진명소 : 광주읍성 동문(서원문) - 광주랑

사진으로 보는 역사 - 사라진명소 : 광주읍성 동문(서원문) - 광주랑

 

 

 

광주 읍성터는 1992년 4월 전라남도청 주차장을 만들기 위하여 부지정리를 하던 중

확인된 유적으로 지적도상에도 그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1879년 간행된 「광주읍지」에는 석축 둘레가 8,253척, 높이 9척이며 성안에 1백개의 우물과 여첩이 있으며,

못은 지금은 없어지고 성문으로 서원(瑞元 동), 광리(光利 서), 진남(鎭南 남), 공북(拱北 북)의 4문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904년 광주 읍성의 인구는 1만명 내외였으며, 성은 그때까지 잘 남아있었다.

1931년 기록에는 관찰부(觀察府)가 무덕전(武德殿)자리에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읍성의 철거는 1909년 일본군이 한말 의병항쟁을 탄압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자리에는 도로가 개설되어 일본인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는데 오늘날의 충장로 2·3가이다.

동헌등 조선시대 광주읍성 관아가 있었던 전라남도청은 고려초기 무진년명

석등(시유형문화재 제5호)등의 유물로 보아 원래는 절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읍성은 조선시대 이후에 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성벽과 관련된 돌들과 흙으로 된 둑만 일부 남아 있는데 확인된 성벽이 높이는 1.9m 이다.

(문화재자료 제20호 : 1994. 4. 13 지정)

 

 


▶ 광주읍성 이야기


광주읍성은 중앙로∼황금로∼구 시청사거리∼도청 뒤∼노동청∼전남여고∼중앙 초등학교 정문까지 석축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성밖은 모두 도랑을 파서 외부침입을 막았으나 도시가 커지면서 성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1908년부터 8년에 걸쳐 바지게 등을 이용하여 작업이 이루어졌다.

4대문을 열고 닫을때는 태평소를 불며 취타(吹打)를 울렸다.

취고수(나팔수와 북잽이)는 노란제복을 입고 남색띠를 둘렀으며 머리에는 초립을 쓰고 미투리를 신었다.

지금의 충장로 2가 조선대학교 동창회관 쪽에서 무등극장에 이르는 일대가 옛날의 광주객사터였는데,

 객사안에는 목사의 집무장소로 쓰인 동헌과 부속건물이 있었다.
(자료 : 광주광역시,「광주의 맛과 멋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