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누려라 광주/정보

[광주여행]<칠석동> 은행나무와 고싸움놀이

[광주여행]<칠석동> 은행나무와 고싸움놀이


 지도에서 광주의 아래쪽, 나주로 가는 길목을 보면 칠석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좀더 아래로는 영산강으로 이어지는 지석천이 흐른다. 얼핏 보아도 너른 들이 펼쳐진 곡창지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마을 뒤 죽명산에 옻돌이라 부르는 까만돌이 많아 칠석이라 부른다. 



<고싸움놀이전수관>


이 마을은 알게 모르게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특히 전통문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지에 버금가는 중요한 동네다. 안동의 차전놀이와 함께 전통놀이의 대표로 남아있는 고싸움이 전해지는 곳이 여기다. 마을앞에 최신식 건문로 지어진 고싸움놀이전수관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고싸움놀이 전수관 뒤쪽 테마공원에 있다.

고싸움놀이테마공원
<고싸움놀이테마공원>

테마공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잘생긴 정자다. 빨간색의 기둥이에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정자에는 부영정이라 씌여진 현판이 붙어있다. 그리 고아해보이거나 소쇄원 제월당에 비길만큼의 유려함도 찾을 수 없지만, 그 내력만큼은 만만치 않다. 조선초에 왜군을 물리쳐서 태종때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던 김문발이라는 인물이 낙향해서 지은 정자가 바로 이 부영정이다. 그러나 역사적 의미는 이 정자의 건물에 있지 않다. 그 쓰임새를 보아야 한다. 김문발은 부용정을 세우고 여기서 지방자치의 기초가 되는 향약을 가장 먼저 시행하게 된다. 이 사실이 역사적으로 공인된다면 중종때 조광조가 중국 여씨의 남전향약과 주자의 백록동규약을 본받아 시행하였다는 향약의 시발점보다 100여년이 앞서는 최초의 향약발생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사학자들이 이곳을 성지처럼 눈여겨 보는 까닭이다.

부용정
<부용정>

두개가 붙어 있는 부용정현판
<두개가 붙어 있는 부용정현판>

인조 17년(1639년)에 최초의 광주향교지로 발간된 광주읍지 재학편에 <황해감사를 지낸 부용 김문발이 광주에서 최초로 향약을 설행했다>기록이 있고 보면 이 설이 사실일 가망이 높다 하겠다.또 이곳 부영정향약을 본받아 바로 옆동네였던 양과동에서도 이선제가 향사들과 함께 양약을 시행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부용정에서 테마공원을 가로질러 나가면 엄청 큰 은행나무가 한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도 김문발이 부영정을 지으면서 함께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실제 나이가 800년이 넘은 것으로 조사돼 사실여부를 떠나 그 당시에 심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나무 앞쪽에는 작은 저수지까지 있는데, 전해지는 내력이 사뭇 재미있다. 

고싸움놀이테마공원
<고싸움놀이테마공원>

소의 전설이 남아있는 은행나
<소의 전설이 남아있는 은행나무>


칠석동의 옛모습이 흡사 소가 앉아있는 형상이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러한 지형은 기가 세고, 소가 움직이면 마을의 기가 다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소 머리 앞에 구유모양의 연못을 만들고 소 머리 위에는 소가 가만히 있도록 고삐를 메는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800년된 은행나무이고, 구유를 대신한 연못이 지금의 저수지라는 얘기다.

구유를 상징하는 저수지
<구유를 상징하는 저수지>

때문에 예부터 이 은행나무는 서낭나무로 추앙되어 왔는데, 이 나무는 할머니 당산으로 마을앞 들판에 있고 뒷산에는 할아버지당산나무로 추앙받는 소나무가 하나더 있다. 동네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 전날  두 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거, 제가 끝나면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나누어 고싸움 놀이를 하였단다. 고싸움은 용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형상화 한 것으로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함이라 알려져 있는데, 거센터를 누르기위한 비보풍수적인 의미가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