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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광주여행]무등산자락에서 충효의 길을 걷다

[광주여행]무등산자락에서 충효의 길을 걷다


명산은 큰 사람을 낳는다고 했던가? 광주의 명산 무등산도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무등산이 배출한 인물들의 발자취를 찾는 여행도 남다르지 않을까? 무등산을 오르는 대표적은 길은 두갈래. 시내에서 광주천변을 따라 증심사쪽을 오르는 길이 먼저고, 두 번째는 산수동오거리에서 고개를 넘고 산길을 거슬러 원효사를 찾는 길이다. 신기하게도 증심사길은 무등산이 낳은 예술가들이 터를 잡고 있다. 우제길을 시작으로 허백련까지 예술의 밸트를 이루고 있다. 반면 원효사로 가는 길은 나라를 지킨 장군들의 터전이다. 무등산이 낳은 애국지사들이 역사를 달리하며 이 길을 지키고 있음이다. 예술벨트는 이미 한번 소개한바 있으니, 이번에는 충효밸트를 걸어본다.



<충민사 앞>

 이길은 두곳에서 갈 수 있다. 산수동 사거리에서 무등산길을 접어들어 지산유원지 앞에서 전망대쪽으로 오르면 된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면 무진고성을 만나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청풍쉼터다. 여기서 충효동쪽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또 하나는 5.18 민주화 운동 묘역을 돌아보고 충효동으로 와도 된다. 이길에는 먼저 경열사를 만난다. 여기서는 고려말기의 명장이었던 정지 장군을 모시고 있다. 정지장군은 나주에서 태어났으나 여기 무등산에서 은거하다가 돌아가신 분이다. 이분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 대첩과 더불어 고려때 왜구격퇴의 3대첩으로 불리는 관음포 대첩을 이끈 분이 정지장군이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에 반대 했다가 축출당해 무등산에서 일생을 마친 분이다. 

운암서원
<운암서원>

경열사를 지나면 청풍쉼터다.  충효동을 향해 조금 더 오르면 작은 마을 전체가 음식점 간판을 단 회암마을이 나온다. 마을길을 벗어나 오르막이 시작되는 시점에 운암서원이 있다. 무등산에 왠 서원? 서원에는 사당이 당연히 있으니, 의아해 할 필요는 없다. 서원의 내막을 알고 나면 더욱 그러하다. 이 서원에 배향된 이는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해광 송제민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이지만,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사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나라를 위해서 온 몸을 바친 분. 알고 나면 어떤 장군보다 사랑스러운 이가 바로 송제민이다.
 그가 기구함은 태어날때부터라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홍문관이었는데 울음소리를 듣고 탄식하기를 “참, 애석하다. 이 아이가 보통 사람과 달리 매우 현명하기는 하겠으나 운명은 너무 기구하겠구나” 하였단다. 그 말이 사실이기라도 하듯 아홉 살때 아버지가 당시의 실세 윤원형의 눈밖에 나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그조차도 과거조차 볼 수 없었다 한다. 그럼에도 워낙 총명해 일찌감치 세상물정에 통달했다 한다. 그로 인해 토정 이지함의 제자가 되어 산천을 유람하게 된다. 스승 지함을 통해 만나 사람이 임난때 최고의 의병장으로 이름난 조헌과 김천일이다.
송제민은 서해안의 섬들을 돌아다니던 중에 임진난을 맞게 된다. 김천일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의병장이 된다. 

운암서원 외삼문
<운암서원 외삼문>

운암서원내 영모재
<운암서원내 영모재>

그리고 충청도지역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키도 하고, 고경명이 금산에서 전사하자 광주땅으로 내려와 의병을 모집키도 했다. 그 와중에 형제처럼 친했던 조헌이 금산에서 의병 700명과 함께 순절하고 생사를 같이 하기를 맹세한 의병장 김천일마저 진주성에서 순절하고 만다. 상심한 송제민은 잠시 지금의 운암서원이 있는 곳에 잠시 숨어들기도 했지만, 당시 상중이었던 외가쪽 친척 김덕령을 찾아가 ‘나라 일이 먼저이고 집안일은 나중’이라는 의리로 설득하여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한다. 손수 제주까지 가서 군마 30여필을 구해와 그에게 주고 권율 장군에게 보낸다. 그러나 김덕령마저 모함으로 젊은 생을 마감하자 실의에 빠져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는 이름을 제민(濟民)에서 제민(齊民)으로 바꾸고 침잠한다. 이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서민(庶民)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불운한 시대를 쓸쓸히 마감한다. 운삼서원 안에 있는 영모재가 그를 모신 사당이다.

충민사
<충민사>

충민사
<충민사>

 운암서원을 지나면 곧바로 충민사를 만난다. 사찰이 있어도 좋을 만큼 산 기운이 좋은 자리다.충민사는 전상의 장군을 모신 곳이다. 광해군때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동포 300여 명을 귀국시킨 인물이 바로 전상의 장군이다. 그는 인조때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임금의 피난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5일동안 안주성에서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광주로 피난하고, 얼마 안 있어 정묘강화를 체결하고 화친할 수 있었다.

충민사내삼문에서
<충민사내삼문에서>

충민사에서 한구비를 돌아 오르는 무등산길을 따라 고개마루에 오르면 두갈래 길이 나선다. 오른쪽은 원효사 가는 길이고 왼쪽은 충효동 가는 길이다. 왼쪽 충효동 방향의 내리막길 바로 앞에 충장사가 있다.  임난때의 명장이었던 김덕령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충장사 홍살문
<충장사 홍살문>

김덕령 장군이 태어난 곳은 충장사에서 조금 더 아래 마을, 석저촌이다. 현재의 지명이 충효동인데, 이 명칭이 김덕령장군의 충효정신을 기려 왕이 내린 지명이란다. 장군은 본래 둘째아들이어서 큰 형이 고경명을 따라 의병으로 나갈때도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형이 금산에서 전사하고, 송제민이 설득하자 이미 벼르고 있던 마음을 가다듬어 의병을 일으킨다. 이후 권율장군 휘하에서 영남서부지역을 맡아 방어를 하게 된다. 수많은 전투에서 그의 위용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 전투가 소강상태에 있을 무렵 부여에서 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났고, 장군은 권율의 명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러 떠나게 된다. 그러나 도착도 하기 전에 역적 이몽학은 자기 부하에 의하여 처단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몽학과 내통하여 토벌에 소극적이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속에 투옥 된지 20일 만에 죽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스물 아홉이었다고 한다. 

충장사 사당
<충장사 사당>

충장사 비각
<충장사 비각>

광주호변에 있는 취가정이 바로 김덕령 장군의 억울한 알려주는 대표적인 장소기도 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장군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한맺힌 노래 취시가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는 그 정자가 취가정인 게다.
충장사 뒤에는 김덕령과 자손들의 묘가 있어 한번쯤 고개숙여 들여다보아야 할 곳이다.

김덕령장군과 가족들의 묘
<김덕령장군과 가족들의 묘>

서울의 충무로가 이순신장군의 이름이듯 광주의 충장로는  김덕령장군의 이름이다. 이처럼 광주를 빛낸 옛 선인들이 무등산과 함께 하였다. 
이 길은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지만 흥청망청 지나는 길이 아니라, 내 스스로 보다 남을 위해 뭘 하였는 지를 되돌아보는 의미있는 발걸음으로 지났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