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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조선시대 지방 국립 교육의 산실 - 광주향교 [광주랑]



조선시대 지방 국립 교육의 산실 - 광주향교 [광주랑]





나주향교와 전주향교를 다녀온 후 광주향교도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좀 걸어보니 향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곳에도 하마비가 있었군요.




하마비와 정문 사이에는 비각이 있는데 안에는 많은 비석이 놓여있습니다.

외삼문 오른쪽에 있으며 향교의 건축 및 이전, 건물들의 신축과 보수를 기념하여 세워놓은 비석으로써, 

향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나 역사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주향교와 나주향교와 비교시 입구가 조금은 작지만 그래도 운치있는 모습이 좋습니다.

물론 규모면에서도 비교시 좀 작습니다.




담벼락 넘어로 보이는 한옥의 기와가 아담하니 보기 좋습니다.




광주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 유학을 온 백성에게 가르쳐 교화(가르치어 착하게 만듦)를 시키기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석산(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있었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는 바람에 공부를 하기가 힘들어 성의 동문(지금의 대인동)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무등산 호랑이라...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풀어보겠습니다.(설마 야구팀을 떠오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곳은 좁고, 건물도 오래되고, 땅이 낮아 여러가지 불편과 홍수의 피해를 많이 입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진 후 (1488년 권수평현감) 

지금의 광주 향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위치는_



주소는_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22-3번지

전화는_ 062-672-7008

홈페이지는_ http://www.gjhyanggyo.or.kr/





그럼 경건한 마음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외삼문을 지나 막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동재와 화장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서재가 보이며 왼편에는 명륜당의 측면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향교를 방문시마다 보이던 커다랗던 은행나무가 보이질 않습니다.

입구 왼편에 은행나무 한그루 겨우 있는데 수령도 200여년밖에 되질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 하고 찾아보니...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때 일본군이 광주에 쳐들어와 

향교의 모든 건물들을 불 지른 후 1600년 유림 및 백성들이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그 후 1841년 화재로 인해 명륜당과 동, 서재가 불탔고 조철명 목사가 다시 한번 지었으며,

 그 후로 여러번의 수리와 재건축을 한 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발걸음을 더 옮겨 안쪽으로 들어와 봅니다.

내삼문이 반깁니다.





.......

西齋(서재)
서재는 "서쪽에 있는 집"이란 뜻으로 평민의 자제들이 기숙사 건물로 사용했으며 현재는 향교 전교님(교장선생님) 및 어르신들께서 사무실로 쓰고 있습니다.




內三門(내삼문)
"안쪽에 있는 세 칸의 문"이란 뜻으로 대성전을 출입하는 문으로 학교와 사당을 구분하는 경계가 됩니다. 

해가 뜨고 지는 자연법칙에 따라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오며 중문은 (제수 : 제사음식, 제기 : 제사용 도구, 축문 : 기도문)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東齋(동재)
동재는 "동쪽에 있는 집"이란 뜻으로 양반의 자제들이 기숙사로 사용했으며 현재는 전통혼례시 신부대기실과 관리자 처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전통예절, 다도, 폐백실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서무에서 하고 있습니다.





明倫堂 (명륜당)은... 
8칸으로 된 학교기능의 대표적 건물로서 "인륜을 밝히는 집"이란 뜻으로 학생(교생)들을 모아놓고 "강"이란 문답식 수업을 했던 장소입니다. 

현재 유교경전인 4서 5경 등 고급반 한문교육을 하고 있는 장소이며 일반인 남여들을 위한 예절 및 한문교육 강의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명륜당은 2008년 현재 재보수ㆍ수리 하였다합니다.






그럼 내삼문을 향해 올라가 봅니다.




반쯤 열려있는 문사이로 대성전이 보입니다.




大成殿(대성전) 
"공자님의 궁전"이란 뜻으로 공자님과 그 제자, 우리나라 학자들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음력 2월과 8월 성정일(길일) 석전대제라는 제사를 지방수령 및 유림들이 성균관과 전국 234개 향교에서 일제히 경건하게 드리고 있으며 

중요 무형문화재 제 8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성전의 주위를 잠시 둘러봅니다.

........

........

문은 굳게 단혀 있어 내부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文會齋(문회재)
사마재 라고도 하며 "학문을 하기 위해 모이는 집"이란 뜻으로 옛날 생원과 진사(과거 3번의 시험 중 1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던 일종의 대학 건물입니다. 원래 향교의 동쪽 외곽에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며 없어졌다가 1987년 정해규 전교 때 복원했으며 

현재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2시간씩 기초한자, 사자소학, 명심보감, 추구 등 중급 한자반 교실로 쓰고 있습니다. 

특히 월요일과 목요일 동양철학, 4서5경, 관혼상제 등을 강의하는 유교대학 강의실로도 쓰고 있습니다.


이날 제가 방문을 하였을 때에도 안쪽에서는 수업이 한창이였습니다.




養士齋(양사재)
육영재라고도 하며 "선비를 양성하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지방의 영재 40명을 선발하여 과거시험을 준비시키던 일종의 입시학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초등학교 건물쯤되며 옛날에는 향교의 남쪽에 있었으나 소실된 후 1985년 정해규 전교 때 유림들과 더불어 복원했습니다. 

현재 매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서예교실 및 전통혼례 폐백실로도 사용하고 있으며 각 단체의 소회의실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광주향교에서는 유교대학뿐만 아니라 예절교육 그리고 다채로운 채험등이 계속해서 프로그램으로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http://www.gjhyanggyo.or.kr/)를 참조하시거나

전화(062-672-7008)로 문의해 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충효관에서는 충효예 일일캠프, 3차원 체험교실, 충효관체험교실 등 방학을 맞이하여 많은 체험행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접수는 수시로 한다고 하니 부모님과 아이들과 함께 좋은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왔던 길쪽으로 다시 걸어가 봅니다.




역시 걸어온 길과 가는 길의 느낌은 다릅니다.




.....

.........

이번에는 출구로...




이렇게 광주향교의 방문을 마치고 다시 시민공원의 주차장으로 왔습니다.


전통체험이라고 해야 할까요? 

광주향교에서는 예절교육과 함께 다례체험

사자소학전통음악 체험 등등


참으로 다채로운 행사와 체험이 준비 되어 있었습니다.

아참 전통혼례도 있었군요.




이제 아이들의 방학과 함께 본격적인 휴가와 더불어 무더위가 시작 되었습니다.

알찬 여름을 산과 바다에서 뿐만 아니라 
 향교에서의 전통체험으로 아이들과 부모님과 함께 뜻깊은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늘 행복한 여행길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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