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식물의 뿌리를 뽑아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줄기를 힘껏 잡아당기면 흙을 단단히 쥐고 있던 잔뿌리들이 투두둑 터지는 소리를 내며 한 덩이 흙과 함께 딸려 올라오지요. 그렇게 뽑혀 버려진 식물은 더 이상 자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습니다.
부서져 철골만 남은 건물이 크레인에 매달린 채 위태로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육중한 콘크리트의 무게를 고스란히 관람객에게 전가하며 뜯겨지는 뿌리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2016 광주비엔날레, 박인선 작가는 왜 이 건물들을 크레인에 매달아 두었을까요?
<사진_뿌리 serise 01 91.0×72.7 mixture 2014>
”제가 역마살이 없어서 그런지 대학 때문에 잠깐 떠났던 것 빼면 1982년 태어난 이래로 쭈욱 광주에서만 살았어요.“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광주에 애착이 많습니다. 어릴 때는 광주 봉선동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 시절만 해도 봉선동에는 푸른 산 아래로 오밀조밀한 집들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산이 깎여나가고, 그 자리에 삭막한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고 해요. 푸른 산책로가 일품이었던 그 동네는 이제 먼지들만 자욱한 공기가 들어찬 아파트 촌이 되었죠. 환경도 변했을 뿐 아니라, 이웃간의 삶도 삭막하게 변했습니다.
“월산동 까치고개에 외갓집이 있었어요. 오래된 한옥집이었고 제 작업실이기도 했죠. 그런데그 자리에 도로가 놓이면서 집이 헐리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전시회를 가졌어요. 그 전시를 마지막으로 외갓집이 철거되었습니다. 공간에 관심을 갖게된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어쩌면 작가는 공간의 파괴와 함께 자신의 삶과 추억의 일부가 함께 훼손당하는 아픔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흔적만 남은 옛 터 앞에서 몇 번이고 추억을 더듬었을테지요. 그 후로 작가는 광주 이곳저곳에 낙후된 공간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외갓집이 허물어지던 2006년부터 틈틈이 ‘공간‘에 대한 작업을 해 왔다고 해요.
“작업의 1단계는 사진, 2단계는 그래픽작업, 3단계가 페인팅 작업이에요. 1단계 사진촬영 단계에서 여러 곳을 다니며 관찰하게 됩니다. 그 때 공간이 제게 주는 어떤 감정이 있어요. 그것이 작품의 시작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벽면의 이끼나 실금, 너덜거리는 페인트 같은 것들이죠. 공간은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어요. 집마다 기운이 있죠. 어떤 집은 섬뜩하고, 또 어떤 집은 포근하게 느껴져요. 그러면 한 때 이곳에는 누가 살았을까, 이 공간엔 어떤 기억들이 있을까, 그런 인간의 흔적들에 대해 떠올려 보게 되요.“
<사진_ 뿌리 serise 03 91.0×72.7 mixture 2015>
결국 작가는 모두가 떠난 공간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고, 허물어 완전히 사라질 공간을 그림이라는 기록으로 영원히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공중에 매달린 건 단지 건축페기물이지만, 창과 문, 철골로 이루어진 저 공간은 분명히 한때 사람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한때 저곳을 터전 삼았던 그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작가는 그것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정착하지 못하는 사회의 위태로움, 아슬아슬 정처없이 떠도는 사람들의 삶을 말이지요.
”생활하는 공간에 맞춰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새도 바뀌는 것 같아요. 획일화된 아파트가 들어설수록 서로의 삶도 단절되고 개인주의화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아파트에서 자란 요즘아이들이 과연 우리 어린시절과 같은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저는 공간이 주는 정서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아파트 같은 평면적인 공간에서 자란 아이들과, 각양각색의 입체적인 공간에서 자란아이들의 정서가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사진_2013 간판집 130.3×162.0>
그림 속에 나타난 이미지들은 작가가 광주의 재개발지역을 돌아다니며 수집하고 모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광주에 살면서 도시의 변화를 지켜봐온 사람들이라면, 이 그림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다시 상기되는 순간, 우리는 혼란스러워집니다. 무언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아쉬움,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 또 한편으로는 다시 마주한 우리의 그리움이 크레인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6년 정도 대인시장에 작업실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그 근방 골목길도 다 철거될 예정이라고 해요. 재개발이 되면 원래 그곳에 있던 주민들이 그곳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원주민들의 삶은 건물의 철거와 함께 같이 뿌리 뽑히는 거에요.
.....특별히 애착이 가는 광주의 동네들이 있어요. 그것을 밀어낸다고 하면 죄다 아파트가 들어섭니다. 독특한 골목 문화를 만들어 갈 수도 있는데 획일적으로 재개발을 해버리니 광주가 가진 고유의 특색도 많이 사라져버렸어요. 중동, 우산동.... 이제 높은 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특색없는 작은 컴퓨터 칩들이 박혀있는 모양새에요.”
<사진_표류2013>
’표류‘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각기 다른 산업 공간의 이미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슬레이트 지붕이 뒤집혀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모양새이죠.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이 배의 목적지는 없습니다. 정박지를 찾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고 있는 표류선입니다. 작가는, 버려지고 낡은 산업도시를 배에 실어 띄워놓았습니다.
“이 작품을 구상하던 시기에 우연히 세월호 사건이 터졌어요. 정치, 사회적으로도 위태한 시기였지요. 배를 자세히 보면 배 아래쪽이 건물의 지붕이에요. 뒤집히고 아슬아슬하고 불안정한 세상을 주제로 다루던 중이었어요.”
크레인은 허공에 멈춰있고, 배는 갈 곳 없이 표류하고 있지만, 이제 목적지와 방향을 설정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작가는 공간의 폐기될 운명을 작품 속에 오래토록 유예시켜 두었습니다. 소중한 삶의 흔적, 기억의 유산이 이대로 무분별하게 사라지게 두어도 되는 걸까요? 그동안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살아온 건 아닐까요?
“화가 나는 일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에요. 그럴수록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읽어야만 이해되는 글보다 그림이 시각적으로 더 강한 효과를 줄 수 있어요. 한번 두 번, 계속 보다보면 의미를 깨닫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한폭 한폭, 광주의 기억들이 작가의 붓끝에서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남은 비엔날레 기간 동안, 작가들이 표현한 광주의 모습을 둘러보시고 오세요! 예술과 사람, 그리고 사회가 끈끈하게 맺은 유기적인 관계를 깨닫는 좋은 시간이 되어줄 것입니다.
▶ 작가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곳
- 2016광주비엔날레 제1전시실
- 2016년 11월 17일 신세계갤러리, 박인선 두 번째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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