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겨라 광주/문화와 예술

조선 후기 속으로, '양림동'을 거닐다



광주군(光州郡)은 고종 34, 1897년에 승정원일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1897년은 어떤 해[]인가 하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처음으로 연호를 사용하게 된 때랍니다. 1894년 갑오개혁과 1895년 을미사변이 지난 이후죠. 변화의 기운이 휘몰아치던 시기였던 셈입니다. 승정원일기는 행정과 왕명, 출납을 담당했던 승정원(承政院)에서 그날그날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딱히 재미있진 않지만, 이분들이 성실하게 기록을 남겨주신 덕분에 우리는 조선시대 후기의 사건들을 살펴볼 수 있지요.



 행정업무를 하던 승정원의 모습

 


공식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사발령입니다. 광주를 포함해 충주, 원주, 여주, 이천, 익산 등등 13명의 군수가 면직되고, 24곳의 군수가 새롭게 임용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대규모 물갈이! 고종의 개혁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지 않습니까? 2년 뒤인 광무 3년에도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일어나는데요, 이런 기록을 통해 이시기가 얼마나 급변하고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습니다.

 

양림동(楊林洞)버드나무 양이고, 수풀 림이니 그대로 풀어보면 버드나무 숲마을입니다. 처음에는 양촌유림으로 불렸다가 1947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고 합니다. 광주에서 숲을 만날 수 있는 곳인데요, 호랑가시나무 자생지로도 알려져 있죠.



 사진 보시니까 알아보시겠죠? 호랑가시나무, 이 기회에 외워둡시다.^^

 

 

호랑가시나무는 주로 한국과 중국에 분포하는데,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많이 쓰이는 나무입니다. 잎은 뾰족뾰족한 발톱모양이고, 빨간 열매가 많이 달려있거든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사용되기 전에는 주로 뼈 질환을 치료하는 약제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현재 호랑나무 군락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부안과 나주로, 모두 양림동과 멀지 않은 곳이네요. 이쪽의 지질과 기후가 호랑가시나무에게 잘 맞나봅니다. 앞으로도 이 숲이 오래오래 보존되면 좋겠습니다.

 

호랑가시나무 숲 주변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건물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광주에 처음으로 기독교 선교가 시작된 곳이 바로 양림동이거든요. 선교기념비를 비롯해 선교사 묘원이 있고, 우월순 선교사의 사택과 피터슨 선교사 사택터가 있습니다. 또 학교와 병원도 있어, 이 두 기관이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우리가 알 수 있죠. ‘우월순윌슨의 이름을 한자어로 음차해서 부르는 명칭인데, ‘우일선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월순 선교사의 사택은 근대 건축물의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습니다. 회색 벽돌을 네덜란드 식으로 쌓았는데, 이는 아마 일본이 네덜란드와 교류가 잦았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치형 창이 있는 2층집인데요, 우월순 선교사가 1925년에 나환자 치료를 위한 전문 진료소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택은 근처에 있는 충현원과도 관계가 깊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부모를 잃어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우월순 선교사 사택에서 45명이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후 광주 충현 영아원을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월순 선교사 사택

 


길을 따라 걷다보면 광주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와 오기원 기념각이 있습니다. 선교사 오웬의 이름을 역시 우리 식으로 바꾼 것이죠. 오웬 기념각은 현대식 문화예술공간이기도 합니다. 지금과는 약간 다른 그당시의 건축물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에 이곳을 거닐다 보면 어느새 조선 후기 격동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최승효 가옥을 빼놓을 수가 없죠! 예전에는 최상현 가옥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 집의 주인인 최상현이 당시 쫓기던 독립운동가들을 다락에 숨겨준 곳이죠. 독립운동가들에게 계속 지원을 했던 탓일까요. 최상현 일가는 가산이 기울게 되어 최승효씨가 이곳을 인수해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광주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왼쪽은 드라마 <각시탈>의 촬영지였던 오기원 기념각, 오른쪽이 양림교회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또 새롭게 생겨납니다. 양림동을 걷다 보면 빌딩숲을 지날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묘한 향수를 느낍니다. 아마도 2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이 길을 걸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이 길을 다녔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서일까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들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고 느껴지네요. 여러분에게도 그런 소중한 시간과 공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양림동 둘레길을 둘러보시고, 잊혀져버렸던 옛 이야기들을 발견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