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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광주여행]최치원의 향기! 지산제에서.. - 광주랑




<지산제 입구>

광주 월드컵 경기장 앞에서 효천을 거쳐 남평으로 가면 포충사을 알리는 이정표가 줄지어 나온다. 이를 따라 가다보면 포충사 바로 못미쳐 지산제라는 알림판이 나온다.  지나치기 쉬운 이곳이 실제는 보석같은 곳이다. 이곳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다소 의외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여기가 경주최씨 집성촌임을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 진다. 



<지산제외삼문>

뒤쪽에서본 지산제
<뒤쪽에서본 지산제>

 지산제가 어떤곳인지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최치원에 관계된 유적들이 광주에는 없어서다. 이곳은 통일신라말 대학자인 최치원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사당이다. 원래는 영당을 세워 최치원의 초상만을 모셔왔으나, 조선 헌종 때 지산사를 지어 최치원을 중심으로 최운하·최향안 등을 모셨다고 한다. 그 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인해 영당만 남고 모두 철거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922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의 건물중에서 가장 오래된 지산제는 당시 서원의 강당으로 사용하던 곳이라 한다. 건물 중앙에 붙어 있는 지산제란 현판은 김규태가 쓴 걸작으로 소문나 있고, 조선 후기 영당과 서원이 함께 있는 독특한 형태여서 사학연구에도 도움이 많이 되는 곳이다.

지산영당
<지산영당>

지산제본건물
<지산제본건물>

최치원유허비
<최치원유허비>

 이 사당에서 모셔지는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를 주름잡았던 대 학자다.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천재 문장가. 하지만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보이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난세의 영웅이었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부친의 엄하고 목적이 분명한  유학을 한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다. 

지산제 툇마루
<지산제 툇마루>

지산제내삼문 태극문양
<지산제내삼문 태극문양>

그 결과 6년 만인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에 장원합격을 했다.  빈공과는 당나라에서 외국인을 위해 실시한 과거로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귀국 후 출세길이 보장되는 공인된 신분이었다.
과거에 합격한 2년 뒤인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첫 관직에 올랐으나 이듬해 사직했고, 이후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비교적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무렵 ‘황소의 난’이 일어난다.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한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일화가 전하는 유명한 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쓰게된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

지산제풍경
<지산제풍경>

이렇게 시작한 글은 “온 천하 사람들이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 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며 겁을 주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남겨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고변은 황소가 장악한 모든 지역에 이 글을 뿌렸다.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 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이야기가 떠돌았을 정도로 최치원의 글솜씨는 당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후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그는 희종이 신라 왕에게 내리는 조서를 가지고 귀국한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 신라의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했다. 신라 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표문을 비롯한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이었다. 

지산제풍경
<지산제풍경>

그 무렵 신라는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에 따라 지방호족들과 중앙정치에서 밀려난 최치원은 한직을 떠돌다가 은둔을 결심하고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다 홍류동계곡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최치원 자신은 신라인으로 남아 은둔 생활로 일생을 마쳤지만, 유교에서 그의 선읬교에업적은 최승로로 이어져 신흥 고려의 정치 이념을 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최치원은 한국유학사상 최초의 도통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러한 위대한 스승을 모시는 공간이 여기에 있다는 것, 자랑스러워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