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누려라 광주/정보

명가산책 - 고경명 고택

명가산책 - 고경명 고택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명가의 집을 꼽으라면 강릉에 있는 선교장이 첫손에 꼽힌다. 안동 광산김씨 종택이나 지례예술촌 등도 이 반열에 든다. 호남쪽에서는 나주의 임씨 종택과 해남의 녹우당등이 뛰어난 고택으로 꼽힌다. 광주에도 이에 버금가는 집이 있다길래 찾아갔더니 의병장 고경명의 종택이다.
 광주지역의 3대 성씨라는 기씨,고씨,박씨중 하나인 고씨 문중의 어른 집이 있는 곳은 압촌마을. 광주에서 남평 쪽으로 가는 길에 있다. 광주영어마을이라는 간판이 마을이름보다 더 크다.


고경명 종택이 있는 압촌마을 풍경
그런데 참 놀랍다. 입가에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최고의 옛집이라는 선교장의 집들임과 너무 닮아서다. 크기는 작지만 집에 들어앉은 모양새가 흡사하다. 경포호 대신에 압촌제라는 저수지를 끼고 들어가는 모습이랑 서쪽을 향한 나지막한 비탈에 세워진 모습. 뒤로는 울창한 송림에 앞은 탁트인 들녘이 내다 보이는 풍경까지 흡사하다.  또 선교장 집 앞에 활래정이 있다면 이집에는 피향정이 집 앞을 지키고 섰다. 지금은 없지만 피향정 옆에는 낚시를 했을 정도로 제법 큰 연못이 있었다니 더더욱 흡사하다. 큰 집 치고 근처에 연못없고 정자 없는 집이 있으랴 마는 배치된 모양이나 들며 나며 거치는 길들이 선교장과 많이 닮았다.

고원희가옥 입구. 맨앞의 건물이 피향정
고원희가옥 입구. 맨앞의 건물이 피향정
이집에는 현재 고경명의 17대 손인 고원희씨가 살고 있다. 집을 지은 지는 백년이 채 안된다. 때문에 집 자체의 역사와 가구의 귀함은 그리 높다 할 게 없지만, 이 터에 담긴 내력은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존귀하다.
다들 고경명을 장군이라 칭한다. 역사책에도 장군이라 명명되어 있는 듯 싶다. 그럼 고경명이 군인으로 생활한 날이 얼마나 될까? 하루도 없다. 고경명은 무관이 아니라 선비였다.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해 출사 한후, 사간원와 사헌부, 홍문관에서 일했으며, 동래부사와 영암군수등을 지내기도 했다. 특히 이율곡이 아꼈을 만큼 출중한 학식을 갖추고 있었다. 서인이 몰락하면서 고향에 내려와 일명 정자문화의 일원이 되었는데, 석천 임억명, 서하 김성원, 송강 정철과 더불어 식영정 사선으로 불리운다. 이로만 봐도 고경명이 고매한 시정을 갖고 있었던 문인이었음을 쉬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가 전쟁에 뛰어든 것은 나이 60이 되는 때다. 임진란이 나고 선조가 평양으로 천도를 하는 등 온 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가장 먼저 의병을 모아 전쟁에 나서게 된다. 집안의 자식들을 앞세우고 재산을 팔아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전 집안이 죽을 것을 각오한 탓에 오직 한명, 열여섯살이던 막내만을 안동의 학봉 김성일에게 보내 집안의 대를 잇도록 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다.
 고경명은 조헌과 함께 금산성에서 전사를 하게 되고, 둘째아들 인후도 금산성에서 전사를 한다. 당시의 전사들을 기려 숭배하는 것이 바로 칠백의총이다. 이후 장남 고종후와 동생 경흥은 김시민 장군을 도와 진주성에서 싸웠으나 패배를 하자 남강에 투신해 순절했고, 동생인 경신은 제주도에서 전쟁에 쓸 말을 구해오다 풍랑을 만나 익사를 하게 된다. 
뿐만아니다. 고경명의 둘째딸 정유재란때 왜군들의 겁박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안고 순절하였고, 고종후의 장남 고부립은 정묘재란때 의병장이 되었고, 고인후의 차남 고부천은 이괄의 난 때 의병장을 했다.
노를리스 오블리주 라는 말이 바로 이것 아닌가... 얼마전 tv에서 방영되어 반향을 일으켰던 이회영집안에 견주어 한치로 모자라지 않는다. 시대가 앞설뿐 그 역할은 달라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충절을 기려 세워둔 것이 마을어귀이자 집으로 들어가는 고샅 초입에 세워진 고씨 삼강문이다. 여기에는 1충3효2열1절이라 하여 7분의 표창이 모셔져 있는데, 1충은 고경명을 이르고,3효는 고경명의 장남 종후와 차남 인후, 손자인 부금. 고경명의 둘째딸과 조카며느리가 2열로 올라있고, 동생인 경흥이 1절이다.

삼강문과 승훈문
삼강문과 승훈문
삼강문 입구
삼강문 입구
삼강문과 승훈문 앞모습
삼강문과 승훈문 앞모습
삼강문을 지나 작은 산길을 돌아서면 긴 담장 안쪽에 종택의 대문채가 정면으로 보인다. 담장앞에는 퍄향정이라는 정자가 최근에 복원된 듯 새파란 얼굴로 서 있고, 그 옆에는 콩문화 체험관과 수많은 장독이 늘어서 있다. 대문채는  칸 반통의 세칸 기와집이다. 양쪽에 방이 있고 중간에 대문이 나 있다. 지붕만 보고서는 대문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소박한 모양이다.

고택 안채 모습
고택 안채 모습
사랑채에서 내다보이는 안채
사랑채에서 내다보이는 안채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정면에 보이고 오른편에 사당이 한단 더 높게 조성되어 있다. 2칸을 통으로 터놓은 4칸짜리 집인데, 어떤 꾸밈도 없는 단출한 모습이다. 더욱이 특이한 것은 사랑채에 당연히 딸려있는 대청이나 누마루가 전혀 없다는 것. 중간방을 양쪽에 문을 달아 개방함으로써 대청의 역할까지 하도록 한 게 눈에 띈다. 사랑채 왼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연결하는 중문인 셈이다. 안채는 꽤 위엄 있고 규모도 당당하다. 2칸 반의 너비에 길이는 7칸이 된다. 합각문이 아름다운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대청에 이어 툇마루가 건넌방까지 나 있고, 부엌 바로 옆으로 남향의 장독대가 꾸며져 있다. 부엌의 크기만 보아도 당당했을 집안 살림이 짐작 간다.
뒤켠 송림에서 바라본 고택
뒤켠 송림에서 바라본 고택
고택의 담장
뒤켠 송림에서 바라본 고택
고택 전경
고택 전경
이 집을 잘 살펴보려면 집 뒤의 솔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수백년된 소나무 사이로 기와담장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안에 기와집이 들어 있는 풍경이 꽤 아름답다. 담장과 기와지붕 너머로는 길게 퍼져나간 논마지기와 마을 전부가 펼쳐져 있어 명당의 이미지가 한눈에 느껴진다.

고택에서 내다 보이는 콩문화체험관
고택에서 내다 보이는 콩문화체험관
고택은 집모양에서 얻어지는 감흥도 있지만, 그 집의 내력에서 얻어지는 가르침이 더 크다. 이런 측면에서 고경명 고택은 느끼고 볼 것이 많음에 틀림없다.
고택앞 장독 풍경
고택앞 장독 풍경

 

출처 : 유투어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