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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라 광주/문화와 예술

길위의 인문학 강의와 탐방 (첨단도서관)

 

 

2014  길 위의 인문학 - 남도의 경제, 역사를 만나다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인 "길 위의 인문학"을 첨단도서관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남도의 경제와 역사를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제 1탄 영산포의 전화국이 제일 먼저 들어선 까닭은?

2014. 6. 13 (금) 오후 2시 - 4시 강의를 들었는데

그 이유는 쌀 값 시세를 알기 위해서랍니다 ( 일본이 쌀 착취하기 위해서 )

 

김정현 상상창작소 봄 대표에 강의는 너무 흥미진진하다

영산강 350회 그길을 걷다를 쓰는 작가 답게 남도에 문화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그 중 영산포구와 등대 그리고 근대문화유산에 대해서 강의는 계속된다 ...

 

 

 

 

 

2014. 6. 20 (금)  나주 영산포 탐방에 들어가다

첨단도서관을 출발한 차는 영산포 등대앞에 도착했다

 

 

 

 

 

 

 

 

 

 

영산포등대

영산포구는 흑산도를 비롯한 많은 섬들의 수산물들이 몰려왔던 영산강의 가장 중요한 포구이다

흑산도 홍어와 추자도 멸치젓이 들어와 영산포장이 열릴때면 인근 염암, 장흥 강진 사람들이 몰려와서 장사진을 이룬곳으로 홍수 수위를 측정하면서 함께 등대역활을 했던 등대이다

국내 유일의 내륙등대이기도 하다

옆에 황토돗배가 서 있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체험은 못하고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걸어서 영산나루라는 도착했다

옛 동양척식 주식회사 문서고가 있는 곳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문서고

1908년 일제가 한국에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만든 회사인데 1909년 영산포 지점을 설립하고

나주 평야의 질 좋은 쌀을 수탈해 갔던 곳이다 붉은 벽돌 건물이 그대로 존재한다

지금은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되는 곳인데 음악회 전시회 등 문화행사와 팬션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영산포역

기차 미카 23이 서 있다

일제시대에는 40회에 걸처 화물차가 운행을 했다니

수많은 쌀들이 목포를 통해 일본으로 갔고 

면화 옷감 직물 고무신 석유등 필수품이 전라도 땅으로 올라온 곳이다

 

 

 

주변 하역꾼들이 살던 집들이 일본식 건물 그래도 유지되고 있고

부서진 상태로 방치된 곳도 있다

기차역이 나주시내로 가게 되자 영산포 공원으로 만들어져 있다

 

 

 

나주곰탕으로 점심식사를 하다

나주의 대표음식인 나주공탐은 뼈를 고아 만드는 다른 지역의 탕과는 달리

살코기인 양지와 사태를 쓰기 때문에 국물이 깨끗하다

삶은 과정도 나주만의 노하우가 있다니 방문객들의 입맛을 사로 잡는다고 한다

 

나주 곰탕을 먹어보니 국물맛이 진하고 고기도 많이 들어있다

김치와 깍뚝이가 곁드려 나왔다 

 

 

 

점심을 먹고 주변을 걸어봤다

금융회사 건물, 잠사공장,  일제 콘크리트 다리,  옛나주경찰서 건물등

금서교 콘크리트 다리는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아직도 튼튼하다

나주 경찰서는  - 1909년에 건립된 건물로 통치와 착취를 위해 만든 건물로 현재는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사용중이란다

 

 

 

 

 

 

조선의 작은 한양이라는 나주의 궁궐 금성관에 도착했다

금성관

왕을 상징하는 지방궁궐로 매월 음력 1일과 15일에 왕께 충성을 다짐하는 망궐례를 치루던 곳이다

동서양쪽에 붙어 있던 부속건물은 객사로 사신이나 중앙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77년에 다시 복원하였다고 함

 

 

 

나주목 문화관

나주가 983년 나주목이 된 후 1895년까지 전남의 행정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나주목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나주목사행차, 나주읍성과 관아모형 , 3차원 입체상이 나타나는 등 ....

 

 

 

목사내아

나주목사 살림집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실제로 군수가 생활하였던 곳이였으나

2009년 숙박체혐공간으로 활용되어 가족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나주목사중 유석종 목사와 김성일 목사의 딴방이 있고

벼락맞은 은행나무에 대고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소원을 빌고자 .....

 

 

 

나주  서성문 복원시킨 모습이다

 

나주 향교

조선초에 건립된 나주향교는 한번도 화재를 당하지 않아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곳으로

서울의 성균관이 불타 없어지자 나주 향교를 본받아 지었다고 전해진다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의 배치로

대성전 은행나무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하는데 600년쯤 된 것 같다

 

 

 

길위의 인문학을 통해서 남도의 경제와 역사를 배우게 되고

일제가 만들어 놓은 잔재가 아직도 남아서 교훈을 주게 된다

또한 새롭게 변해 발전해 가고 있는 영산포 나주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