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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한번 찾은 사람은 누구라도 잊지 못 할 호가정

 한번 찾은 사람은 누구라도 잊지 못 할  호가정


호가정은 조선 중•명종대 절개의 선비 설강 유사가 지은 정자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덕동 노평산 기슭에
자리한 호가정은 중국 송나라 송강절이 말한 호가지의에서 뜻을 따온 것으로 설강 선생의 기개가 잘 나타나 있다.
호가정은 명종 13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소실되고 고종 8년에 중건되어 재 중수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류하는 이곳의 경치는 한번 찾은 사람은 누구라도 잊지 못 할 만큼 빼어난 곳이다.
 지금은 복잡한 세상사를 잊고자 찾은 낚시꾼들과 물새들의 휴식처로 한적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옛날 설강 선생과 학문을 교류하고 시국을 논하기 위해 찾아 들었을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당시의 모습이 아련히 연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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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정은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인 골기와 팔작지붕의 건물로, 당초에는 중앙에 거실을 두었으나
 중수할 때 이를 없애고 전부 우물마루로 고쳤다. 사방좌우 모서리에는 1칸씩의 낮은 난간을 두었다.
사방 중앙 칸의 가운데는 댓돌을 두어 출입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환벽당의 주인 김성원의 장인인 설강 선생은 연산군 9년 광주광역시 남구 유등곡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27의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재하여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삼사를 거쳐
 무장현감•전라도사•삭주부사•종성부사 등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
, 즉 당파싸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설강 선생은 간신배들의 횡포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광산구 본덕으로 내려와 호가정을 짓고 남은 여생을 편안히 지냈다.




설강 선생이 호가정을 짓고 자신의 마음을 노래한 시가 있다.

시원한 돌베개에 솔그늘 더욱 짙고

바람은 난간을 돌아 들빛이 뚜렷하네

차가운 강물 위의 밝은 달빛아래

눈을 실은 작은 배가 한가로이 돌아온다

아래는 구강이요 위에는 하늘인데

늙은이 할 일 없어 세속에 내맡겼네

바빴던 지난일을 뭣하러 생각할꼬

늦사귄 물새가 한가로이 졸고 있네





조정에서 설강 선생을 다시 중용하여 도승지와 영해도호부사의 직책을 맡겼으나 }
선생은 병을 핑계 삼아 직책을 맡지 않고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여러 선비와 교류하다가
선조 4년 향년 7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설강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학덕과 기절을
기리기 위해 도내 유림들이 경열사를 추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철폐령)으로 인해 경열사가 훼철되었다.





그 후 복원된 경열사에는 정지 장군만 배향되어 있다.


호가정에는 호가정 현판을 비롯하여, 설강의 호가정기와 노사 기정진의 호가정 중건기
 그리고 오겸•이안눌•김성원 등이 새긴 편액 누정 제영이 걸려 있다. 현재는 서산 유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1990년11월 15일에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출처 : 광주관광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