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누려라 광주/정보

결핵구제 공동체 - 광주랑

 1. 일제 강점기 말엽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결핵환자 수는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급속히 증가하였다. 1950년대 한국인의 사망원인 첫 번째가 결핵이었다. 결핵이 가장 심하게 퍼졌던 1953년 한 해동안 결핵으로 사망한 수는 총인구 2천만명 중 무려 8만 명이었다. 광주기독병원은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원된 후, 1951년 고허번(H. A. Codington) 선교사가 재개원하여 결핵퇴치사업에 힘썼다. 1955년에는 주한 미군 등의 지원으로 결핵환자 전용병동 3층을 증축하였다. 광주기독병원의 결핵병동은 환자로 넘쳤다. "광주의 성자" 로 일컬어지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인 고허번 원장은 갈곳 없는 결핵환자들을 돕고 치료하느라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남을 돕다보니 막상 자신과 아내와 자신의 자녀들은 검소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배가 주리곤 하였다. 이현필 선생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같은 동족이지만 돕지도 못하는데 피가 다른 서양 선교사님이 헌신적인 사랑의 인술을 배푸신다" 는 사실을 뜻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전하였다. 그리하여 고허번 선교사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고자 광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였으며, 이현필 선생과 최흥종 목사의 지도로 지금의 신양파크 호텔자리에 천막을 치고 결핵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송등원을 창립하게 되었다. 이 궂은 일의 책임은 이현필 선생의 제자 김준호 선생이 맡았다. 후에 그곳에서 쫓겨나 송등원을 폐쇄해야 했고 김준호 선생은 스승의 말씀을 따라 무등산 계곡으,로 들어가서 막을 치고 무등원이라 이름하고 결핵환자들을 보살폈다.

 2. "맨발의 성자" 또는 한국의 성프란체스코" 등으로 불리우는 이현필(李鉉弼) 선생(1913-1964, 호는 방림)은 한국 개신교가 낳은 수도자이었으며,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현필 선생은 일생을 절식하며 맨발로 다니며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다. 예수를 닮으려는 선생의 열정은 철저하고 진실하였으며 금욕, 청빈, 순결을 실천하였다. 이현필 선생은 수도 공동체인 동광원을 설립하여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이현필 선생은 예수를 믿고 방산(芳山) 장로교회(지금 등광리교회)에 출석하며 등광리의 성자 이공(李空, 이세종) 선생을 만나면서 신앙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현필 선생은 "작은 예수" 로서 한국 개신교의 수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며 신앙의 본질을 가르쳤다. '광주의 아버지' 라 불리던 최흥종 목사는 이현필 선생을 아꼈다. 그는 이현필 선생을 '내 아들아' 라고 부르면서도 이 선생의 삶을 본받아 실천하며 존경하였다. 이현필 선생은 다석 유영모 선생과도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토론자로서 서로 존경을 하였으며, 희생과 섬김의 사람 고허번 선교사(제중병원장)와도 결핵치료 공동체를 이끌면서 헌신적이고 돈독한 동역 관계를 이루었다. 이현필 선생은 수피아여학교 교장이던 유화례 선교사가 6.25 때 피신할 수있도록 인도하여 생명을 구해 주기도 하였다.

 3. 동광원은 한국의 기독교(개신교) 수도원으로서 철저한 남녀유별과 순결, 노동, 수도, 선행, 정직, 성실, 책임, 희생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효소법을 개량한  농사를 시작하였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은 노동으로 자급자족하였다. 이들은 최소한의 양만 먹고 남긴 농산물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 병든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썼으며, 노동과 근검절약을 중시하였다.동광원은 현재 남원에 본부를 두고 있고 여러 곳에 분원들이 있다. 화학산 기슭 도암의 '청소골짜기' (정규수 수녀), 중촌(中村)의 화순(김춘일 수녀) 도구밖골(도구봉) 가마터, 문바위, 이세종 선생의 유적지와 무덤, 각시바위, 소반바위, 바람재, 전남 함평, 진도, 경기도 벽제 계명산(수녀의 마을), 무등산 등에 있다. 광주 동광원은 5.16직후 정부에 의해 폐쇄 조치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귀일원(초대 원장=정인세 1909-1991, 초대 총무 및2 대원장=김은연 1920-1991)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재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1950년대 광주 무등산에서 고아와 결핵환자 등 700여명을 돌보면서 생긴 수도단체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 자신은 하루에 오직 한 끼, 그것도 몇 숟갈만을 먹으면서 고아와 병자들에게 헌신했다. 동광원에서는 자녀를 데려온 수도자들의 경우 그 자녀들을 고아의 무리속에 넣어 똑같이 키우도록 했다. 또 신발을 벗을 때는 나갈 때를 대비해 바깥쪽을 향해 가지런히 놓도록 했고, 먹던 음식물은 조금도 남기지 않도록 했으며, 신자들이 하루에 밥 한 끼씩을 모아 그것으로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일작운동' 을 전개하였다. 이현필 선생의 제자인 김준 초대 새마을연수원장은 이런 삶을 새마을운동에 도입하기도 했다. 이현필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수도자들은 광주와 남원, 화순, 함평, 벽제 등에서 노동수도공동체를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카톨릭 광주대교구는 이현필의 영성을 카톨릭 성녀 소화 데레사의 영성과 일치한 것으로 보고, 5년 전 광주에 그의 삶을 잇기 위한 독신여성수도원인 '소화 데레사 자매원' 을 설립하였다.

 4. 언님

동광원에서 카톨릭 수녀처럼 사는 여성 수도자를 일컫는 말로 다석 유영모 선생이 붙여준 이름이며" 어진님"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2012년 10월 14일 자료발췌  송인동(호남신학대학교 교수, 박물관장) 인용       최종환 씀(광주시 블로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