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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광주여행]외로울땐 극락강 풍영정으로 간다.-광주랑

외로울땐 극락강 풍영정으로 간다.

 옛날. 조선말기 쯤. 광주를 가로 지르는 극락강을 오르내리며 소금을 팔던 강원도 총각이 있었다. 해마다 늦여름에 와서 극락강 나루에서 소금을 싣고 다시 길을 떠나곤 했는데 어느 핸가 가까운 마을에 사는 장 처녀와 눈이 맞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 둘은 견우와 직녀처럼 일년에 단 한번 남의 눈을 피해서 짧게 만날 수 밖에 없었지만 죽어도 서로 헤어지지 않기로 맹세 할 만큼 절절 사이였다. 하지만 양가집 규수와 뜨내기 소금장수와의 결합이 가당할 리 있었으랴. 그러던중 무슨 연고인지 3년동안 소금장수 총각의 종적이 뚝 끊어졌다. 장처녀는 부모님의 영을 어기지 못하고 시집을 가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강원도 소금장수 총각이 4년만에 소금배를 젓고 이곳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토록 오매불망 하던 사람이 남의 아내가 되어 있었으니 총각은 한서린 울음만 터트리다가 돌아갔다. 이를 알게 된 장여인은 밤마다 언덕위의 정각에 올라 총각이 배를 저어 지나간 극락강을 바라보며 한숨과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가 이내 이승을 뜨고 말았다. 이후 그녀가 서 있던 그 자리에 한그루 괴목이 북쪽(강원도쪽)을 향해 자라 강물을 덮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슬프기도 하고 한편으론 너무 흔한 이야기. 장처녀가 죽어 괴목이 되었다는 곳이 지금의 풍영정이다. 




<풍영정 전경>

풍영정 전경
<풍영정 전경>

이야기의 사실을 떠나 예전에는 이곳 극락강까지 소금배가 들어왔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하다 보니 외지 사람들과 얽힌 이야기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중 하나의 이야기가 장씨 처녀의 전설이리라.
 풍영정은 이러한 애절한 전설을 안은 채 극락강 옆 언덕에 서 있다. 넓게 펼쳐진 강의 풍경이 시원스럽다. 극락강이라는 이름조차도 여기서 바라 보는 풍경이 이승의 것이 아닌 극락의 모습이라는 시인 묵객들의 비유어에서 유래했다니 예전에는 풍광이 어떠했을지 쉬 짐작이 간다. 
 풍영정 풍광
<극락강이 내려다 보이는 풍영정 풍광>

풍영정 전경
<풍영정 전경>

 풍영정은 1560년 이곳에 살던 김언거란 사람이 지었다. 김언거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정자를 짓자 당시 임금이었던 명종이 기뻐하며 기인 갈처사에게 현판 글씨를 받아ᄃᆞ 걸라고 했다. 김언거는 기쁜 마음으로 갈처사를 찾아갔으나 여러번 헛걸음을 하였고 14번 찾아간 끝에 만날수 있었다. 갈처사는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 글을 써주며 가는길에 절대로 펴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김언거는 안하무인인 갈처사에게 화도 나고 궁금하기도 해서 종이를 펼쳤는데 순간 첫장의 풍자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놀란 김언거는 돌아가 갈처사에게 다시 써줄것을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대신 그의 제자인 황처사에게 풍 자를 받았다. 그래서 지금도 현판을 자세히 보면 풍 자가 나머지 글자 보다 다르다. 
 풍영정 현판과 시문편액
<풍영정 현판과 시문편액>

 글자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당시 주번에는 지금의 풍영정을 중심 정자로 하고 뒤로 이어진 봉우리들을 따라 마치 징검다리처럼 11채가 더 있었다고 한다. 임란때 왜인들이 다른채에 다 불을 지르고 마지막으로 풍영정에 불을 던지려던 찰나 현판에 새겨진 풍자가 오리로 변해 극락강 쪽으로 날아갔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왜인 대장이 서둘러 불을 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12개의 정자중 풍영정 하나만 남았다는 얘기다. 또 그때 오리가 되어 날아가 버린 풍자는 후대에 다시 써 넣었는데, 이로인해 다른 두 글자와 약간 다르다는 것이다.
 
 풍영정의 명성이 어떠했는 지는 정자 안에 걸린 편액들에서 알 수 있다. 풍영정에는 한석봉이 썼다는 <제일호산>이라는 편액을 비롯해 이황, 이덕형, 송순, 고경명, 김인후등이 지은 시문들이 빼곡이 붙어있다.

풍영정 풍경
<풍영정 풍경>

풍영정 풍경
<풍영정 풍경>

풍영정 기단부
<자연석과 나무로 만들어진 풍영정 기단부>

수십개의 돌 계단을 풍영정에 서면 바로 앞으로 극락강이 지나가고 멀리로 무등산 자락 또한 흘러간다. 극락강에는 길게 철교가 걸려있고 열차가 수시로 강을 건넌다. 
풍영정 앞의 극락강 철교
<풍영정 앞의 극락강 철교>

 극락강 철교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짠한 얘기 하나가 더 생각난다. 김지하에 대한 얘기다.
 70년대, 청춘의 시기를 온통 감옥에서 보냈던 시인 김지하가 80년대 초 출옥해서 처음으로 5·18의 도시 광주 길에 나섰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데 남으로 내려올수록 차창 가로 그 슬픈 황토흙이 유독 도드라지고, 간간이 잔설이 내비치는 풍경에 눈물이 나서 그만 광주까지 오지 못하고 도중에 기차에서 내려 돌아가고 말았단다.

극락강역을 지나는 KTX
<극락강역을 지나는 KTX>

아무튼 풍영정에서 내려다 보는 철교는 어쩐지 애잔하다. 강 건너는 광주역으로 가는 길이고 건너오는 길은 극락강역에 닿는다. 극락강역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ktx 조차도 바로 지나지 못하고 쉬었다 다른 열차를 비켜 가는 곳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지는 않아도 극락강을 거슬러 한번 들여다보는 묘미도 나쁘지 않다.

극락강역 모습
<극락강역 모습>

극락강역 선로 모습
<극락강역 선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