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누려라 광주/정보

엄친아 고경명과 충노비

 조선중기 명종때다. 잘 생기고 기개좋은 젊은 양반이 황해도의 한 작은땅에 관원으로 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한 기생에게 반한다. 그러나 그 기생은 관찰사의 눈에 들어 헤어지게 되었다. 그녀를 보내면서 그는 시 한수를 치마폭에 써 준다.
 “ 강가에 말을 세워놓고 머뭇머뭇 헤어지지 못하며/ 버드나무 제일 높은 가지를 꺽어주네./ 어여쁜 여인은 인연이 옅어 자태를 새고 꾸몄는데/바람둥이 사내는 정이 깊어 뒷날을 기약하네. ”

 기생이 관찰사 앞에서 술을 따르는데 바람이 살랑불어 치마폭에 써 진 글씨가 살짝  보였다.관찰사가 이유를 물으니 기생이 사실대로 말할 수 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관찰사는 그 젊은 양반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대에게 훌륭한 아들이 있더이다. 허나 재주와 용모는 비록 수려하나 행실은 어그러졌더이다.” 하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답하기를  “ 내 아들이 용모는 어미를 닮았고, 행실은 이 아비를 닮았소이다.” 하고는 같이 웃었단다.

 


<고경명의 생가이자 종택>

 바로 이 젊은 양반이 고경명이다. 우리들이 장군으로 알고 있는 그다. 허균의 기록에 남아있l는 이야기인데, 이 글 속에는 고경명이 잘 생기고 풍체가 좋은 미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기다 광주의 3대 명가에 들 정도로 집안까지 좋으니 요샛말로 엄친아임에 틀림없다. 그 뿐이랴. 풍류에도 뛰어나 임억령·김성원·정철과 더불어 식영정 4선이라 불릴만큼 시와 가사에도 재주가 많았다.
이런 고경명이 장군으로 칭송되는 이유가 뭘까? 포충사에 가보자. 포충사는 고경명을 비롯해 임진왜란때 공을 세운 다섯분이 모셔져 있는 사원이다. 

포충사 전경
<포충사 전경>

포충사 정기관
<포충사 정기관>

이 사원에 맨 웃어른으로 배향되고있는 고경명은 벼슬에서 물러나 식영정과 소쇄원, 환벽당 등을 돌며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중 임진난을 맞게 된다. 그때 그의 연세가 60. 난의 향방이 심상치 않자 집안 재산을 틀어 의병을 모집한다. 그리고 전국에 의병을 일으키라는 격문을 쓰기도 한다. 자신의 아들들을 휘하의 장수로 삼아 호남을 지키는 교두보였던 금산까지 올라가게 된다. 금산에서 조헌과 합세하여 싸우지만, 결국 패배하고 목숨까지 잃게 된다. 이러한 의병장의 기록 때문에 고경명장군으로 더많이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고경명의 큰 아들 고종후도 함께 향배되고 있는데, 그는 아버지를 따라 금산전투에 참여했으나 아버지와 동생까지 잃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가세를 가다듬고 의병을 재차 일으켜 진주까지 가서 왜적과 맞서게 된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성 싸움이 바로 김천일과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중과부적으로 왜군에 패하자 남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인물이다.
 세 번째 배향되는 이는 고경명의 둘째아들 고인후다. 고경명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우다 금산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한 분이다.
  다른 이로는 고경명 휘하의 장군으로 금산에서 전사한 유팽노와 인영이 배향되어 있다. 

포충사 신 사당
<포충사 신 사당>

포충사 신 사당
<포충사 신 사당>

포충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정기관에서 이들의 업적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전시관을 지나면 정문에 신 사당이 있고, 왼쪽 언덕위에 구 사당이 있다. 즉, 구사당이 낡아 신 사당으로 옮긴 것이다. 그럼에도 포충사의 진 면목은 구사당쪽에 있다. 

포충사 홍살문
<포충사 홍살문>

포충사 충노비
<포충사 충노비>

구사당이 있는 언덕 아래에는 홍살문이 있는데, 이 문 앞에 있는 커다란 비석하나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자연석 바위를 깍아만든 볼품없는 형상이지만 그 내용은 사뭇 장대하다. 비석에는 <충노 봉이.귀인 지비> 라 씌어 있다. 말 그대로 국내에서 유일한 노비들을 기리는 비석이다. 고경명의 집에서 일하던 노비 중에 봉이와 귀인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둘은 주인은 따라 의병에 참여했다. 금산에서 돌아가신 고경명과 둘째아들 인후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이들이었고, 첫째아들 종후의 두 번째 거병에도 참가해 주인과 목숨을 함께 한 의인이다. 이 비석이 주는 의미는 이들의 충절도 높거니와 당시로서는 천한 신분이었던 이들의 마음을 되새겨 비를 새겨준 고씨 집안의 정성도 높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 포충사를 선조가 세우주자, 사당을 관리할 사람과 비용을 고씨집안에서 내놓았다는 얘기도 흘려들을 수 없을 것 같다. 요즈음처럼 가진자들의 도덕성이 하찮게 느껴지는  때는 더욱 그러하다.

포충사 구 사당
<포충사 구 사당>

홍살문을 지나 구 사당에 오르면 울창한 솔숲이 펼쳐진다. 전망도 아주 좋다. 구사당앞의 잘 생긴 소나무 아래에도 남다른 비석이 있다. 앞면에는<호남순국열사비>, 뒷면에는 고광순, 황현 선생 등 한말 의병장 2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래쪽이 임진왜란때의 의병들을 위한 시설이었다면 이 비석은 구 한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분들의 것이라는 얘기다. 특히 이  비석은 항일의병들의 치적을 살피던 도중 전쟁이 터지자 급히 그 정신을 새기고  훗날을 기약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호남순국열사비
<호남순국열사비>

이처럼 포충사는 고경명 한분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나라를 위해 자신을 버린 분들을 만나는 곳이라 할만하다. 또 구 사당옆으로 난 산길을 따라 가면 편백나무숲을 지나 제봉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산책로도 꾸며져 있다.

구사당에서 본 신사당
<구사당에서 본 신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