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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광주여행] 무등산에도 차밭이 있다 - 광주랑



<차 시음회 장면>

 추사 김정희가 일지암 초의선사에게 이런 글을 보낸다.
“ 당신을 사모하여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니... 오해말고 차나 보내주셔...”
초의선사가 차와 함께 답장을 보냈다.
“사람의 진정성은 알지 못하나.. 차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덜떨어진 사람없다..”
 장난기 가득한 두 사람의 편지다. 역사책에 중요하게 등장하고 당대에도 전국에 명성을 날리던 두 사람의 대화가 이러했다. 차를 맛 본 추사는 그의 대표적작품으로 인정받는 <茗禪> 이란 글귀를 써 보낸다. 이글만 보아도 두 사람의 관계가 쉬 짐작이 간다. 이처럼 차라는 게 귀한 물건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전쟁까지 일으키지 않았을까. 아편전쟁이 바로 이 차 때문에 일어난 것일테니 말이다. 영국에서 중국차가 인기가 많을 때 수입차의 대금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늘어나자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팔아 그돈으로 차 값을 지불하려 하다가 전쟁이 난 것이니 전쟁의 주 원인은 아편이 아니라 차인 셈이다. 이로인해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100년동안이나 뺏기게 된 것이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차는 사람들의 감성을 다스려 왔던 것임에는 틀림없는 듯 하다.

춘설차
<춘설차>

우리나라에도 차가 들어온지가 2000년이 넘는다. 가야의 건국신화에 인도에서 차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도 장군차라는 이름으로 번성해 있다. 또 중국에서 차를 가져와 하동에 심은 것이 하동 야생차로 자라고 있다. 
광주 무등산에도 이처럼 차밭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때문에 무등산에서 차밭을 만난 기쁨은 더할나위 없이 크다. 차라리 신비롭다. 지금껏 봐왔던 차밭들이 바다를 끼고 있었다면 여기는 말 그대로 산속이어서다. 그럼에도 찬찬히 살펴보면 바다옆이나 진배없다. 서쪽에서 불어온 바닷바람이 나주평야를 지나 가장 먼저 부딪치는 곳이 바로 여기 무등산이고, 산세가 높아 구름과 이슬이 많다. 차가 효능을 얻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차를 아는 사람들은 광주의 양대차로 기대승 고택에서 나는 죽로차와 여기 무등산에서 나는 춘설차를 꼽는다.  
춘설차밭가는길
<춘설차밭가는길>

차밭 아래에 있는 의재미술관
<차밭 아래에 있는 의재미술관>

차밭가는길-증심사앞
<차밭가는길-증심사앞>

 차밭은 무등산 증심사 쪽에 있다. 파릇파릇 봄 오는 소리를 들으며 산속으로 들어서면 증심사 앞에서 허재미술관을 만난다. 그곳 뒤의 산자락이 온통 차밭이다. 그러나 차밭으로 가는 길은 조금 더 가서다. 증심사 일주문을 지나고 천왕문 왼쪽의 산길로 들어가면 된다. 옛날에 신림마을이 있었던 곳인데, 손님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기도 했을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 너머로 차밭이 어슴프레 들여다 보인다. 골 안으로 들어가면 푸른 차 밭이 펼쳐지고, 파란하늘과 맞닿은 능선에는 삼나무 두 그루가 올려다 보인다. 가파른 차밭 고랑을 타고 넘으며 생각나는 건 차마고도. 말등에 바리바리 짐을 싣고 험하고 비탈진 절벽 길을 수십일 걸어 도착한 곳에서 그들이 구한 물건이 차(茶) 였다는 사실. 그 애잔한 모습들이 떠 오른 건 단순히 감성의 과잉만은 아니다. 여기가 단순한 녹차밭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차마고도를 연상케하는 차밭
<차마고도를 연상케하는 차밭 풍경>

차밭 풍경
<차밭 풍경>

이 차밭을 만든이는 일본인이었다. 일제시대에 한국사람들의 고혈로 만든 차밭일 터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으로 일궈낸 사람은 의재 허백련이다. 의재는 남종화의 명인이었을 뿐 아니라 차의 명인이었고, 화가이기 이전에 혁명가였다. 그 모습이 이 춘설차밭에 드러나 있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사람이 운영하던 증심사 차밭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게 되자 의재는 이를 맡아 ‘삼애다원’을 차리고 손수 ‘춘설’이라는 이름을 붙인 녹차와 홍차를만들어 팔았다. 학생들을 공짜로 가르치기위한 수단이었다. 농업진흥이 나라를 살리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던 의재는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이곳 무등산 자락에 설립하고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교육재정은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의재는 학생들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새잎으로 녹차를 만들어 서울 중앙부처로 차를 팔러 다녔다. 당시 차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지만 고관대작들은 몸소 하얀 백발에 한복차림으로 서울을 찾은 대가에 대한 성의표시로 차를 사줬다고 한다.

차밭 풍경
<차밭풍경>

차밭 풍경
<차밭 풍경>

 차밭 윗자락에 올라서면 아래서와는 완전 딴판의 세상이 보인다. 세인봉을 시작으로 무등산 자락이 반달처럼 연결되고, 오른쪽 트진 공간으로 광주시내가 보인다. 
바로 아래는 녹차밭에 맛대어 증심사를 에워싼 대숲이 화룡점정의 역할을 한다. 사찰과 녹차밭이 회화적인 조화뿐 아니라 차에 담긴 내면적 조화까지 엮어낸다. 무등산이 만 백성의 평등을 상징하고, 대중불교를 주창했던 원효가 이 산에서 수행을 했다는 사실. 여기에 원효는 가루차를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눠 마셨다 하고 그 차를 사람들은 무애차라 불렀다 하니. 이 춘설차가 바로 무애차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차밭 풍경
<차밭풍경>

차밭 풍경
<차밭풍경>

차밭 풍경
<차밭풍경>

 송나라때 나대경이라는 사람이 ‘한사발 춘설차가 부귀영화보다 좋구나!“ 라고 했다지. 여기 무등산의 춘설차가 바로 이 글귀에서 유래한 것이니 그 뜻마저도 참 좋다. 차라는 게 한모금 갈증을 없애진 못해도 삶의 깊이를 돈독케 하는 것인 만큼 춘설차가 이래서 남다른게 아닐까?

차밭 풍경
<차밭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