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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재미와 일상

호남인물열전_'고산'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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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 윤선도"
윤선도(尹善道, 1587년~1671년)는 조선 중기의 시인·문신이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함께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다.
자연을 소재로 지은 시조 짓기가 뛰어나서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가인(三大詩歌人)으로 불린다.




 
▲해남 윤(尹)씨 녹우당 (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선생의 고택) ; 전남 해남군 해남읍


▼금쇄동 : 전남 해남군 현산면

 
 "
천년의 비경이 어찌 나를 위해 열려서 나로 하여금 날로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게 하는가"
고산선생이 금쇄동을 얻고서 이른 말이다.


보길도_ 세연정 ; 전남 완도군 보길면

고산 윤선도 선생은...
인조14년, 인조의 삼전도 치욕을 계기로, 평생 초야에 묻혀 살것을 결심하고
육지가 아닌.. 제주도 로 향했다. 그러나 풍랑이 거세서 보길도에 배가 닿았고...
보길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 라고 말하고
완도 보길도에 정착했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승보시, 향시, 1612년(광해군 4년)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71세까지 활동하여 벼슬이 의금부 도사, 공조좌랑, 예조정랑, 예조참의,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며, 남인의 거두로서 치열한 당쟁 속에 휘말려
일생을 거의 벽지 유배소에서 보냈다.
죽은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고산 윤선도(1587 선조20∼1671 현종12)선생은
조선중기에 호남이 낳은 대시인(大詩人)이며,
조선조 시조문학을 마지막 장식한 대가로 알려진 분이다.

정치의 중심에서 나랏일을 맡았을 때는 정성을 다하여 국가경영의 대도를 역설하셨고,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 세차례에 걸쳐 십수년의 유배생활을 하시는등
유배와 출사, 은둔으로 이어져 있지만,
그 근본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정신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잘 형상화하여 국문학의 비조로서
우리에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겨주신 분이다.
한시는 물론이고 국문시가는 값진 국문학의 보배이다.

해남 육현(六賢)의 한 분으로서 향현사(鄕賢祠)인 해촌서원(海村書院)에 배향 되었다,


고산 윤선도 선생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