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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라 광주/문화와 예술

2014 길 위의 인문학 - 남도의 경제, 역사를 만나다 (첨단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 내 쌀 뒤주를 열어가시오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인 "길 위의 인문학"을 첨단도서관에서 듣게 되었는데

남도의 경제와 역사를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강연과 탐방을 3회에 걸쳐서 하고 후속모임으로 참여수기 작성들을 하기도 되어있다

2차로  내 쌀 뒤주를 열어 가시오~라는 구례 운조루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제 2차  내 쌀 뒤주를 열어가시오 (강의)

2014.  7. 11(금)  10 - 12

대상 ; 일반인 30명

강사 : 최한선 전남도립대 교수

 

 

배품의 미학인 노블리스 오블리지를 실천한  가문으로

첫째로 경주 교통 최부자집을 뽑을 수 있고

둘째로 정읍 산내면 강진 김씨와

세째로 구례 운조루를 만든 유덕호를 뽑을 수 있는데

 

 

 

 

운조루란?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칠언율시에서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는데 ...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라올 줄 아네.>

 

운조루를 만든 사람이 꿈과 이상이 엄청 크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즉 배품의 미학을 실천한 가문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네리고 있다

 

 

구례 운조루에 대해서 눈여겨 볼 3가지 중

첫번째 쌀독이다

구례 토지면 오미리  이곳에 아흔아홉칸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운조루가 있는데

이 댁 사랑채 부엌에 놓은 특이한 쌀 뒤주 하나,

그 뒤주 아래 쓰인 글씨 他人能解 (타인능해) - 누구라도 이 뒤주의 쌀을 퍼 갈 수 있단다

즉 내 쌀을 뒤주를 퍼 가시오 라고 써인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남도인의 나눔과 공유 그 실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두번째 굴뚝  (옆으로 되어 있다)

토망밑에 (계단밑)에 있다

연기가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밥 먹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에서

 

세번째  5대손 유제양이 지은 이산유고와

7대 유형업이 지은 농사일기 (남도 농촌현실을 알려준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 인문학의 부활이며 지방화 시대인데 지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의 확산에 따라 세계는 앞 다투어 지역을 혁신 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으면 질 높은 삶과 보람 있는 인생을 실현시키려고 소홀했던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답니다

 

 

인문학이란 사람을 다루는 학문이며 인생에 대한 학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행복하고 바람직한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더 나은 인생인가? 라는 질문에  진지한 성찰을 하는 것이 인문학의 핵심이어야 한다고 호소한다

 

즉 경제적 가치 보다는 사람의 존재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학적 사고에서 강의를 하려고 하셨다

 

 

나눈과 베풂의 미학이 길위의 인문학이며

자야 김영한 의 시처럼 1300억원 /  내님의 시 한줄 값도 안되는 푼돈 ...

인문학은 무가지보라고 할 수 있겠다

 

 

길 위의 인문학 탐방

주제 : 내 쌀 뒤지를 열어가시오 ~~

일시 : 2014. 7. 18 (금) 8: 30 - 17 : 00

장소 : 구례  담양

대상  :  30명 외 관계자 5분

강사 : 김정현 상상창작소 봄 대표

주제도서 :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문화재청)

 

 

7월 11일 강의에 이어서 7월 18일 오늘은  탐방날이다

8시 30분에 버스가 첨단도서관을 출발하자 김정현 강사에 인사에 이어서 오늘 참석해 주신 박영철 광산구 교육도서관과장, 김선영 첨단도서관 팀장, 이훼리 도서관 담당의 인사가 있었고 탐방일정의 설명이 있었다

첨단도서관을 출발한 차는 구례 화엄사와  운조루에 이어 매천사 그리고 담양 연계정까지 돌고 왔습니다

 

 

 

 

 

 

  

김정현 강사님에게 화엄사 일주문에 써 있는 현판에 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백제 성왕 22년 (544) 인도스님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창건 후

백제 법왕 (599)때 3천여명의 스님들이 주석하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답니다

신라 선덕여왕 14년에는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73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웠고 문무왕 17년에 의상스님은 장육전 (지금의 각황전)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제일 큰 석등을 조성했답니다

 

 

 

 

 

 

 

 

 

 

 

 

1500년을 이어온 화엄사 도량에는 백제, 신라, 고려, 조선으로부터 이어왔고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 앞마당 대웅전, 각황전을 중심으로

절묘하게 조화된 가림배치의 아름다움을 주며

쌍사자 석탑, 석등, 보제루 누각, 각황전, 구층암 등이

각기 다른 독특한 개성을 뽐내면서도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답니다

 

 

 

 

 

오미리에서 점심을 먹고 운조루 답사에 나섰는데

운조루 마당에 들어섰을 때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블리스 오블리지를 실천한 가문에서 배품의 미학을 찾고자

운조루 여기 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특히 운조루에서 쌀통과 굴뚝을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라는 칠언율시에서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라올 줄 아네.>

운조루를 만든 사람이 꿈과 이상이 엄청 크다는 뜻이라니 ..

 

 

 

 

 

 

 

 

 굴뚝 모습입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독에 쌀을 채워놓고 목독에 구멍을 내고 마개에 '他人能解' 라는 글귀를 써두어 가난한 이웃에게 쌀을 꺼내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우리네 조상들의 나눔의 삶, 베품의 정신을 알려주고 있다.

 

 

 

 

 

안체에 들어서서 떨어지는 빗방울도 운치가 있다

그 때 이 가문의 어르신 종부께서  들어오신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가옥이다.

조선 영조 52년(1776)때 유이주(柳爾?)가 낙안군수로 재직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대문과 행랑채 남쪽마당 건너에 연당이 있는데, 이는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과 삼태봉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된 55칸짜리 목조기와집이다.

이 곳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인 ‘금환락지’의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운조루’란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큰 사랑채 이름으로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이 있으며,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라는 칠언율시에서 따온 것이다.

 

 

매천사

비가 마구 쏫아진다더니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매천사에 도착했다

우국지사 매천 황현선생의 업적을 들으니 모두가 숙연해진다

우리는  잠시 짧게 황현선생을 위해 묵념을 했습니다

애국지사이신 그 분의 뜻을 조금이라도 기리는 의미로 ....

 

매천사는  황현 선생(1855- 1910) 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황현선생은 한말 우국지사이자 시인이며 문장가이다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서 어려서 부터 시를 짓고 재질이 뛰어났다

1894 동학혁명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끼고

경험한 견문한 바를 기록한 "매천야록 " "오하기문"을 지어 후손에게 남겨주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김택영과 국권회복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린다. 생전에 살았던 곳에 그의 후손과 지방 유림들이 1955년에 세운 이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담양 연계정

유희춘의 강학과 휴식 공간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방 두 칸을 얹은 구조

관리가 안 되어서인지 어수선하고  빛바랜 목재들이 그런대로 고색창연한 느낌을 풍긴다.

 

 

 

연지를 한 바퀴 빙 돌자 섬(모현관)으로 드나들던 출입구가 있다.

얼마전까지 여기 이 곳에 미암일기와 미암집 목판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연못의 습기 때문에 보존상의 문제가 있어 미암박물관으로 옮겨갔단다.

 

 

 

 

 

 

연계정은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이 만든 정자이다

조선 선조 때의 관리로 본관은 선산, 자는 인중, 호는 미암과 연계다.

 1513년 전라도 해남현 해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글 읽기를 좋아해(나랑 비슷하다) 26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홍문관 수찬, 무장 현감 등을 지냈으나, 35세에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이기, 윤원형 등의 간신들이 명종을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를 속여 일으킨 옥사)에 연루되어 1547년 제주도로 유배된다. 유배지가 고향 해남과 가깝다고 해서 최북단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되었다.

 20여년의 귀양살이 속에서도 학문에 계속 정진하여 <속몽구>, <육서부록> 등의 책을 저술했으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1567년 선조 즉위와 동시에 학문이 해박하다는 이유로 사면되었고, 홍문관 교리에 재등용되어 임금의 스승이 된다. 이후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 등 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김인후, 이황, 기대승, 이이 등과 교우하였으며, 특히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과 교분이 두터워 그를 어의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있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아 1577년 다시 상경, 입궁을 기다리던 차에 65세를 일기로 죽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절’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담양 의암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