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누려라 광주/정보

추억의 흑백사진 9. 사라져간 경양방죽

소멸은 늘 아쉬움을 남기기 마련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이였던 시대 치수 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물을 잘 관리하는 것이 곧 제일의 정치였던 시대,

1440년 세종 22년 세종의 중농정책을 받들어 김제부사에서 광주 목사로 부임한
김방이 3년여에 걸쳐 호남 최대의 인공호수를 만들었으니, 그 이름은 경양방죽 !

광주고등학교~계림초등학교~광주상업고등학교의 정문앞에서 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남서쪽 일대에 펼쳐진 면적 4만6천여평, 수심 10m 의 경양방죽은 이후  5백여년 동안 광주사람과 함께해왔다.

2-3백년된 거목들이 큰 숲을 이루어 여름이면 그 그늘에서 땀을 식히곤 하였고,
팽나무, 귀목나무, 왕버들나무, 수양버들이 즐비해 광주사람들에게 낭만의 공간이었다.
호수에는 두개의 섬이 있었으며 맑은 물에는 잉어, 붕어, 가물치가 많아 물위로 튀어 올랐다.
봄이면 북, 장구 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울려 퍼졌던 풍류의 한 장소. 겨울이면 얼음을 제치면서 스케이트를 타던 곳. 뱃노리를 즐기는 유람객들에겐 낭만과 추억을 선물했던 데이트의 장소였으리라.
 
광주시민들의 젖줄이자, 쉼터 그리고 낭만의 대명사로 자리해왔던 경양방죽은
1940년 일제의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2/3가 매립되었고,
1966년 광주시의 수원 기능의 약화와 수질 오염 그리고 도시 확장등을 이유로 매립되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만수위때의 경양방죽의 모습이다. (1946년)
한껏 멋을 부리고 양산을 바쳐든 아낙네와 힘차게 노를 젓는 남정네...이들은 아마도 데이트를 즐겼으리라
.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46년 2/3가 매립된 뒤의 만수위때 모습


한 동네의 무리인가. 아님 한 일가인가. 아이들과 아낙네들에게 뱃놀이라는 특별한 추억을 선물하고자 했을 저 어르신네는 지금쯤 어찌 되었을까. (1940년. 광주1백년사진 자료 중에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40년 뱃노리를 즐기던 유람객들 (자료: 광주1백년사 기념사진전)


두 개의 섬이 있다는 기록을 입증이라도 하듯 경양방죽이 품고 있는 섬이 하나 보인다. 축축 늘어진 수양버들에 풀을 뜯는 소가 한가로움을 더한 목가적 풍경이다.  1961년 광주여고 졸업앨범 중에 이런 사진이 있었을 만큼 경양호는 광주의 상징이었으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61년 광여고 졸업앨범 중


아니...이건 웬 이색적인 풍경인가. 얼음을 재치는 얼음 썰매도 아니고...
꽉 낀 상하의에 날선 스케이트라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습들이 프로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도 미상 (자료: 빛고을 1백년사 사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