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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려라 광주/정보

[광주여행-빙월당] 고봉 기대승 선생의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는 백우산 자락의 월봉서원 빙월당




[6월19일에 찾았던 빙월당]


[5월28일에 찾았던 빙월당]

 지척에 두고도 장성 살고 있는 10년만에 처음 찾아간 월봉서원! 그 속의 중심 빙월당!! 행정구역상으로는 광주광역시에 속하지만 거리상으로는 장성의 황룡면에 무척이나 가깝다.  월봉서원은 두번을 찾아갔다. 한번은 이슬비가 고즈넉히 내리는 5월의 끝날에, 또 한번은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의 중순을 조금 지나서... 맑은 날과 흐린 날 모두 사진을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의 전통고택은 날씨에 따라 그 운치와 멋이 다르다.  쪽빛 하늘에 뭉게구름 화창한 날에는 왠지 기와지붕 사면의 그늘이 시원하다. 이런 날엔  어린 도령들의 글읽는 소리보다는 삼삼오오 무리지어 왁자지껄 흥겨움이 느껴지고, 차분하게 보슬비 내리는 우중충한 날에는 왠지 모르게 차분함이 좋다.  처마에 또르르~ 방울처럼 떨어지는 빗방울이 참 싱그럽다. 글방에 모여 앉아 훈장님의 지도아래 초롱초롱한 눈망울 똘망스럽게 뜨고는 낭랑하게 서책을 넘겨가며 글읽는 소리 잔잔하게 빗속에 녹아 들것 같다. 전형적인 팔작지붕의 형태의 빙월당! 네 첫마의 살짝 들어 올림의 미학이 참으로 멋스럽다.






장성 황룡면에서 광주시 임곡면으로 가는 길에 호남선 철도가 광주로 이어진다.  그 철길 아래에 아주 작은 터널을 지나면 보이는 월봉서원의 안내표지판이 큼직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을 지나 조금 더 가다보면 또 하나의 이정표가 나오는데 바로 이곳의 마을의 안쪽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  한참을 걷다보면 오른편으로 밭 중간에 쌓아 놓은 세개의 돌탑이 보인다. 누굴까? 왜 만들었을까?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게 만드는 곳!  지나가는 마을 분이라도 있으면 물어 보면 좋으련만!  밭을 일구다 나온 돌들인가, 아님 일부러 가져다 쌓은 것일까?  그래서 나름 이름을 지어본다.  "삼형제 돌탑" 의문을 가진채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나무 숲속에 가려진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아담한 정자가 보인다. 처음엔 이곳인가 했다.  이곳은 조선중기의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의 장남 기효회가 지은 정자라고 한다. 주위에 일곱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칠송정 이라고 지었다 한다. 칠송정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기대승의 묘가 있다.





백우산 자락에 위치한 광곡마을, 일명 너브실 마을로 불리우는 곳으로 빙월당으로 가는 길의 흙돌담벼락이 백여미터 조성되어 걸어가는 내내 4백여년 전의 그때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5월에 찾았던 그때는 마침 빙월당 앞에 지어진 강수당에서 "월봉서원 체험의 날" 프로그램으로 "선비의 하루" 교육을 받으러 오는  초등학생들을 만났다. 카메라를 들어 보이자 자연스럽게 포즈를 잡아주는 아이들이 귀엽다.





 월봉서원은 고봉 기대승(1527~1572)을 주벽으로 문장과 학행으로 이름 날린 눌재 박상, 시인이자 영의정을 지낸 박순  김장생, 김집, 등의 조선조의 명신들을 배향했던 서원으로 현재는 고봉 선생만을 모신다. 1578년 호남유생들이 지금의 신룡동인 낙암 아래에 망천사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터만을 보존하다가 1941년 빙월당을 짓고, 1978년부터 후손들의 협조로 현재의 위치인 너부실(광곡마을)로 위치를 옮겨 중건을 했다.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등을 중건하고 1981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고봉 기대승 선생은  조선중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 호는 고봉, 시호는 문헌이다. 당시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선생과의 13년간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8년간 사단칠정[四端七情]을{仁의 측은지심, 義의 수오지심, 體의 사양지심, 智의 시비지심의 사단, 인간의 일곱개의 감정, 즉 희,노,애,락,애,오,욕] 사단은 선한 마음의 이성[理性]을 가리키고, 칠정은 본능적 감정[感情]}  주제로 펼친 논쟁은 유명한데 이를 통해 고봉은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더욱 넓혔고,  뒤에 다가오는 율곡의 성리학에 영향을 주었다.  분명 고봉 기대승의 성리학은 한국의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빙월당으로 향하는 계단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강당은 푸른하늘과 어우러져 드높은 선비정신을 보여 주는 듯 장엄하다. 


빙월당에서 바라보는 장판각 (월봉서원내 자료를 보관하는 부속건물)




월봉서원의 주강당으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 9호로 지정되어 있다.  

"빙월"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빙심설월"[氷心雪月] 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가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빙월당 강당이 앞 뒤로 있는 마루에 삼삼오오 걸터 앉아서 수다도 떨며, 배운 것을 서로 나누는 어린 제자들의 모습이 아른 거리는 듯 하다. 고봉 선생의 명성에 비추어  어린 도령들 보다는 장성한 청년들의 듬직한 학문의 열정과 나라 위한 우국충정의 수많은 논의들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사료된다. 더불어 호남의 내로라 하는 학문의 대가들이 자연풍광을 예찬하고, 시를 짓고, 고금의 학문을 논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의 논의들이 많았을 것이다.




월봉서원을 감싸고 있는 담 넘어 뒤편에서 담은 빙월당과 그 부속건물들 입니다. 


월봉서원  왼편 담 건너에서 담은 장판각과 빙월당, 그리고 아래쪽으로 존성재와 명성재!


백우정에서 바라본  빙월당!


빙월당 뒷편으로 숭덕사로 올라가는 계단 위로 마음을 정갈히 하라는 의미의 내삼문인 정안문이 보입니다.  계단을 높게 한 까닭도 아마도 그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발 한 발 내 딛으면서 잡념을 떨쳐 버리라는 ...


정안문을 살짝 넘어서서 야트막한 기와 담장을 너머로 바라보니 자연풍광이 참으로 멋지게 펼쳐집니다.  


문헌공 기대승 선생을 배향하는 월봉서원 사당입니다. 



월봉서원의 기숙사로  동재인 명성재와 서재인 존성재

각각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데 정성을 다하라 라는 의미와 또 하나는 자신을 성찰하라는 의미의 기숙사이다. 




월봉서원의 오른편에 위치한 백우정!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했다해서 이름되어진 백우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정자이다.  백우산은 해발 260미터의 야트막한 산이다.  예전에는 청량산이라 불리우다가 언제부턴가 백우산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조금 더 살펴보자면 청량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불교적 의미의 이름이고,  백우산은 소의 형상을 빗대어 표현한 풍수적 의미가 강하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 풍수지리가 성행했던 조선조로 넘어오면서 이런한 산 이름에서도 변화의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주로 소이름이 들어간 산은 그 형세가 부드럽고 완만하다고 한다. 이름의 흰백자는 무엇일까?  [목,화,토,금,수]의 오행론에서 흰색은 금이며, 서쪽을 상징하는데 이런 의미가 있다고 한다.  고봉의 묘소가 백우산 자락에 자리한 것도 이러한 풍수지리를 중요시한 것이 아닐까 한다. 


풍수학의 고전인 설심부에 보면 산은 인물을 관장하고,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 한다. 고 합니다.  월봉서원의 앞쪽으로는 활처럼 휘어 흐르는 황룡강이 위치하고 있어 재물이 풍부한 터임을 의미한다 하겠다. [내용참조-원광대 조용헌 교수의 계산풍류]


 퇴계 선생과의 사단칠정을 논하던 그 시절, 퇴계는 58세, 고봉은 32세로 퇴계는 성균관의 대사성이라는 원로학자의 위치에, 고봉은 대과에 급제한 촉망받는 신예학자였다고 합니다. 26세나 연상인 대학자 퇴계와의 논쟁에도 학문적 권위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관점을 피력할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또한 아들 같은 나이의 고봉을 학문적 상대자로 인정해 주었다는 것은 퇴계의 인품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덕목이다.  당시의 새로운 별처럼 떠오르는 신예학자를 통해 다양하고 새로운 관점의 의견을 경청했고, 고봉은 학문적 대가의 퇴계로부터 더욱더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성찰할 수 있는 성숙의 계기로 삼았을 것이다. 


 퇴계가 서울 한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고봉은 한강가에서 유숙하며 봉은사까지 따라가 그를 배웅하며 배가 떠나려 할때 다음의 시로 석별의 아쉬움을 표현했다고 한다.   

한강수는 밤낮으로 넘실넘실 흐르니 

떠나시는 우리선생 어찌하면 붙잡으리 

모래가에 닻줄 끌고 못 떠나게 배회할 제 

밀려오는 애간장 시름을 어찌 할꺼나.


월봉서원 빙월당을 둘러보며 400여년전의 성리학의 대가중의 대가 퇴계 선생을 만나 학문적 깊이를 더욱 높여 갔던 고봉 기대승 선생의 훌륭한 선비의 정신을 차분하게 마음속에 새기고 돌아 갑니다.~